22화. 춘배의 속사정
상쾌한 아침 공기를 가르며 폴짝폴짝 뛰는 듯 걷는 수봉의 발걸음이 신났다. 그가 도착한 곳은 골목 끝에 위치한 금식이 새로 산 집이었다. 녹슬고 군데군데 감청색 칠이 벗겨진 오래된 철대문 앞에 이르자 '하하! 호호!' 여럿 웃음이 문을 넘어왔다. 어? 춘배 형님과 잊지 못할 촉감을 선사한 주리 말고 누가 더 있나? 수봉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철대문을 천천히 밀어 안으로 들어섰다. 20평 정도 되는 잡동사니로 지저분한 마당 중앙에 수십 장의 적별돌이 쌓여 있고 바닥에는 주리가 챙겨 온 찔레꽃, 라일락, 수선화, 장미, 라벤더, 유채꽃, 목련꽃 등등 형형색색의 꽃모종들이 즐비했다. 그리고 춘배, 주리와 함께 웃음을 섞은 주인공은 연실과 순희였다.
“와우! 이렇게 다 같이 보니 기분이 가 심쿵따리 샤바라 한데요! 하하하!”
주리만 있는 줄 알았는데. 언니들이 많을수록 좋은 수봉이었다.
“왔어!”, “오셔쎄용~”, “안녕하세요~”
춘배와 주리, 순희가 동시다발로 반갑게 맞았다. 연실은 엷은 미소로 고개만 까닥였다.
“근데.... 연실 씨하고 순희 씨는 어쩐 일로 오신 거예요?”
수봉이 도리도리 둘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연실은 말없이 손가락으로 순희를 가리키며 억지로 끌려 왔다는 듯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순희는 연실의 팔을 팔꿈치로 ‘툭’ 치며 언니도 오고 싶다며, 라고 나직하게 말했다. 서로 흘기는 그녀 둘을 보며 미소 짓던 춘배가 입을 뗐다.
“며칠 전에 순희 씨가 가게 와서 금식이 전화번호를 묻더라고. 그래서 금식이 사정 얘기하면서 우리 계획에 대해 말해 줬지. 그랬더니 순희 씨도 꼭 돕고 싶다고 하더라고.”
“금식이 전화번호는 왜?”
수봉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바짝 세워 순희를 응시했다.
“실은.... 저희 엄마가 금식 씨한테 큰 신세를 져서요.”
“신세요?”
“네. 며칠 전 새벽에 엄마 혼자 편의점을 보고 있는데 강도가 들었거든요....”
“강도요?!”
수봉과 주리의 눈은 땡그레 졌으나 춘배와 연실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인지 별로 놀라지 않았다. 순희는 물건을 사러 온 손님이 엄마를 구하고 홀연히 사라졌다는 사건의 전말을 간략히 설명하고는,
“엄마를 대신해서 사례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매장 cctv를 확인해 보니까.... 글쎄, 금식 씨 더라고요. 그때, 금식 씨가 아니었다면 엄마가 어떻게 됐을지....”
순희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모모모모! 얘기만 들어도 오줌을 지릴 것 같은데. 그분 정말 대단 하시네요옹!”
주리가 자신의 손을 맞잡고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금식이한테 그깟 강도쯤은 세발에 사발이죠. 걔가 생긴 게 순박하니 돌 감자처럼 보여도 아우~~ 특전사 출신이거든요! 강도가 때거지로 덤벼도 기냥!!! 특공무술로~~”
‘팍! 팍!’을 입으로 소리 내며 허공에 당수를 날리는 수봉은 자신이 한 것인 양 우쭐하게 너스레를 떨었다. 특전사란 말에 주리의 눈이 또다시 땡그레졌다.
“그... 친구분 혹시, 몇 공수인지 아쎄요옹?”
“며, 몇 공수요? 그게 뭐예요?”
당수를 멈춘 수봉이 주리를 갸우뚱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아니에요옹~~ 호홍~”
“자아~! 이제 시작합시다~~”
그만 노닥거리자 라는 투로 춘배가 일의 시작을 알렸다. 수봉이 오기 전에 각자 할 일에 대해 조율이 된 듯 주리는 두서없이 섞여 있는 모종을 같은 종류끼리 정리했고 연실과 순희는 잡동사니로 지저분한 마당을 정리, 청소하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춘배와 수봉은 화단 조적 작업을 위해 마당 중앙에 있는 벽돌을 철대문 오른편 담벼락 쪽으로 날랐다. 그렇게 벽돌을 나르는 척하면서 수봉은 주리 곁으로 사부작사부작 다가갔다.
“오우~! 이 꽃은 뭐예요? 완전 귀엽다아~”
앙증맞은 크기로 송이송이 핀 남보라색 꽃을 가리키며 수봉이 물었다. 주리는 좋은 질문이라는 듯 밝게 웃으며 말했다.
“큰 개불알 꽃이요옹~~”
물어봐도 하필, 개불알. 그것도 큰.... 당황한 수봉의 양볼이 붉게 물들었다. 쑥스럽게 웃던 수봉은 짧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개불알꽃 하니까.... 갑자기 옛 생각이 나네요.”
추억이 돋는지, 수봉은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사연이라도 있나? 주리는 매우 궁금하다는 듯 수봉과 눈을 맞췄다.
“저 어릴 적에 유명한 야구선수가 모델로 나온 영양제 광고가 있었거든요. 게브랄 티라고.... 그리고, 기관지 약이었던 거 같은데.... 아, 맞다! 소부랄! 하아.... 이 꽃 덕분에 잊고 있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네요. 하하하!”
주리도 눈살을 찌푸리며 웃었다. 그리곤 생각했다. ‘뭐래? 옐, 어쩌면 좋지?’ 넌지시 듣고 있던 연실과 순희도 주리와 같은 표정 같은 생각이었다. 이때, 춘배가 다가와 수봉의 목덜미를 잡아끌며 어쩌면 좋을지 해결했다. 질질 끌려가는 수봉을 보며 그녀들은 유쾌하게 웃었다.
오전의 태양은 어느새 정오를 알렸다. 철가방을 들고 온 배달원이 바닥에 넓게 깔린 신문지 위에 짜장, 짬뽕 각 두 개, 볶음밥 하나, 단무지 접시 3개, 탕수육 대자, 튀김만두를 빠른 손놀림으로 꺼내 놓았다. 계산은 춘배의 몫이었다. 배달원이 떠나자 깔아 놓은 신문지 위로 하나둘 자리를 잡고 앉았다. 춘배 곁에 연실이 붙어 앉으며 노골적인 관심을 드러냈다. 그런 연실을 보며 눈살 찌푸리던 수봉은 주리에 옆자릴 차지했다.
“아침부터 고생 많으셨어요. 약소하지만 맛있게 드시고 오후도 힘 내주세요.”
춘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두가 잘 먹겠습니다~ 합창을 했다. 수봉은 무서운 속도로 짬뽕을 흡입하며 탕수육과 만두를 입에 욱여넣었다. 하나라도 더 먹기 위해. 사소한 잡담을 나누며 모두의 그릇이 비워질 때쯤 연실은 짜장면을 오물대는 입을 가리고 춘배에게 물었다.
“금식 씨랑 친한 건 아는데.... 근데,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예요? 가족이면 모를까....”
연실의 말마따나 가족이면 모를까, 생판 남인데. 이유가 다들 궁금했는지 이목을 집중했다. 춘배는 엷은 미소를 띠며 들고 있던 짬뽕그릇을 내려놓았다. 그리곤 시선을 허공에 두고 잠시 생각하다, 입을 뗐다.
“저도 어머니랑 단둘이 살았거든요. 살았던 곳은 남해의 작은 어촌이었고요.”
“아버님은요?”
연실의 물음에 곁에 있던 순희가 그녀의 옆구릴 쿡 찌르며 “그런 걸 왜 물어.”라고 낮게 속삭였다.
“괜찮아요. 하하! 아버지는 태어날 때부터 안 계셨어요. 아버지가 누군지 궁금해 어머니께 물어보면 그냥, 배 타고 나가서 죽었다고만 했으니깐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하는 춘배와 달리 연실, 순희, 주리의 표정은 숙연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수봉은 '얌얌! 쩝쩝!' 대며 탕수육을 게걸스럽게 줄여나갔다.
“뻘에서 일한 걸로 먹고 사느라 어머니가 고생 참 많으셨는데... 저는 정신 못 차리고 사고만 쳤으니.... 결국, 고등학생 때 절도로 소년원에 가고 말았어요....그래도 자식이라고.... 어머니는 4시간 거리를 하루가 멀다 하고 면회 오셨어요...."
그때의 아픔이 느껴지는 듯 춘배는 오른쪽 눈살을 조금 찌푸렸다.
"그런데 어느 날, 다리에 깁스를 하고 목발을 짚고 오셨는데, 하필 비도 많이 와서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셨더라고요. 그 모습 왜 그리 속상하던지, 다신 오지 말라고 못되게 굴었어요. 그날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어머니한테 편지를 썼어요. 앞으로 정말 잘하겠다고, 출소하면 열심히 돈 벌어서 일단 전국 일주하고 다음은 세계일주를 시켜드리겠다고. 금식이 어머님처럼 제 어머니도 여행이란 걸 가 보신 적이 한 번도 없으셨거든요...."
그녀들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없이 고개만 주억거렸고 수봉은 쩝쩝 소릴 멈췄다. 춘배는 또다시 허공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의 눈에 회한이 차올랐다. 시선을 그대로 둔 채, 무겁게 입을 뗐다.
“편지는 붙이지 못했어요.... 다시 오지 말라고 한 날, 어머니가 탄 고속버스가 빗길에 전복돼서..... 돌아가셨거든요.... 말이 씨가 된 건지, 정말 다시는 못 오게 돼 신 거죠....”
모두가 침묵으로 답했다. 연실과 순희는 눈물을 글썽였다.
“아이고! 제가 괜한 소릴해서 분위기가 상갓집이 됐네요! 죄송합니다~!”
축 처진 분위기를 띄우려 춘배는 목청을 높여 활기찬 표정으로 사과했다.
“아니에요... 제가 괜한 걸 물어봐서.... 죄송해요....”
연실은 눈을 아래로 깔고 앓는 소리로 사과했다. 춘배는 그런 연실을 귀엽다는 듯 바라보며,
“별말씀을요. 뭐, 어쨌든! 금식이 어머님을 보니까 꼭 제 어머니 같아서, 그래서 그냥, 뭐라도 해드리고 싶었어요.”
춘배의 밝은 웃음에 그녀들의 표정에도 환한 기색이 돌았다.
“자아~! 재미없는 얘기는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다시 화이팅 해 볼까요?!”
구호 마냥 그녀들도 함께 화이팅을 외쳤다. 수봉은 하나 남은 튀김만두를 예의 주시하며 젓가락을 슬그머니 들이밀었다. 이때, 튀김만두를 잽싸게 낚아챈 연실의 젖가락이 춘배의 입가로 직행했다.
“어? 괘, 괜찮아요. 연실 씨 드세요.”
“아니에요. 말하시느라 하나도 못 드셨잖아요.”
“어서용~~” 연실의 애교 섞인 간청에 춘배는 멋쩍게 만두를 받아먹었다. 수봉은 그런 둘을 향해 고깝게 눈을 흘기며 콧김을 씩씩 뿜었다. 춘배가 엉덩이를 털며 일서자 모두가 따라 일어나 그릇을 치우고 일을 개시했다. 그녀들은 화단에 꽃을 심기 시작했고 화단 조적 작업을 끝낸 춘배와 수봉은 집안으로 들어갔다. 현관 양옆, 누렇게 변색된 흰색 시트지가 군데 군데 벗겨진 신발장과 수납장을 지나 거실로 들어서니 복층 구조의 집안은 먼지만 수북히 쌓인채 텅 비어 있었다. 그래서 인지, 40평 평수가 거짓말 조금 보태 두 배는 돼 보였다. 휘이, 둘러보던 춘배는 차에서 청소기를 갖고 오겠다고 수봉에게 말하곤 집밖으로 나갔다.
‘왔어! 왔어! 와았써어어~ 전화! 전화!’ 수봉의 핸드폰이 경망스럽게 울었다.
“어, 금식아.”
[수봉아. 미안한데 이틀만 공방 좀 봐주라.]
“간병인은 어쩌고?”
어머니로 인해 벌어진 그간에 일들을 설명하는 금식의 목소리에서 착잡한 심경이 전해졌다.
“간병인 대신 있어야 된다면서 이틀이면 되겠어?”
[월요일에 퇴원하실 거니까.]
“워, 월요일? 내일모레잖아. 위중하시다면서 그렇게 빨리?”
수봉이 당황해 물었다. 깊은 숨소리가 대답을 대신했다. 마음을 추스르는 듯 그러고 있기를 잠시,
[병원에서.... 할 수 있는 게 없데....]
“아....”
무슨 말이 필요하랴.
“그래. 공방 걱정은 말고 월요일에 보자.”
[고맙다. 수봉아...]
춘배가 청소기를 들고 현관을 들어서니 수봉이 어두운 표정으로 전화를 끊었다.
“왜? 무슨 일인데?”
수봉은 금식과의 통화 내용을 말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수봉의 어두움이 춘배의 마음에도 스몄다. 서로 숨소리만 교환하며 침묵으로 뜸을 들이다, 춘배가 애써 표정을 밝혔다.
“수봉아! 서두르자!”
***
월요일, 정오를 앞 둔 시각, 바리바리 짐을 든 금식과 산소마스크를 쓴 어머니가 백세병원 입구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수봉이 크게 손을 흔들며 뛰어왔다. 어머니가 어눌한 발음으로 날나리 아저씨다, 라며 반겼다. 수봉은 과하게 입을 벌려 웃고는 금식에게 휴대용 산소통을 받아 어머니를 부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