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반 스케치 수강(1)
작년 여름,
스툴 제작을 막 끝내고 앉아 쉬려는데 때마침 보험 영업을 하는 친구 'P'가 공방에 놀러 왔다. 고객관리차 외근이 있는 날이면 방앗간 참새 마냥 꼭 들렀다.
"웬 일로 바쁜가 보네."
다행이었다. 'P'한테 앉아 있다 걸리는 날엔 '놀려고 장사하냐, 이럴 봐엔 폐업하고 직장을 다녀라, 노후는 어쩌려고 그러냐, 라며 쓴소릴 들어야 했기에 이날은 타이밍이 좋았다. P의 쓴소리가 기분 나쁠 때도 있지만 참을만했다. 밥을 사니까. 여타 친구들은 밥은커녕 껌하나 안 사면서 감 놔라 배추 놔라 하는데 P는 그나마 양심적이라고 할까. 뭐라도 먹이면서 그러니 말이다. 솔직히, 밥값이라 생각하면 못 들을 소리도 없다.
'P'가 오면 밥을 먹기 위해 늘 가는 곳이 있다. 현금 계산 시 짜장면 2500원, 짬뽕 3000원 하는 가격 끝판 왕,
중국집이다. 맛이 뭐가 중요한가. 500원만 추가하면 곱빼기를 먹을 수 있는데. (현 고물가에도 가격을 안 올린 사장님께 경의를 표한다) 두말없이 곱빼기로 난, 짜장, P는 짬뽕을 시켰다. 밥 잘사 주는 매우 고마운 친구지만 한 가지 서운한 게 있었다. 바로 미니 탕수육이다. 오천원만 더 쓰면 맛볼 수 있음에도 'P'는 맛있겠다, 군침만 흘릴 뿐, 결코 주문하지 않았다. 이유를 모르니 애가 탔다. 까짓것 손수 사 먹으면 그만이지만 그건, 내 거지근성이 허락지 않았다.
사달라, 말 못 하고 고심만 깊은 가운데, 짬뽕 곱빼기를 젓가락질 3번 만에 먹어 치운 'P'는 이빨을 쑤시며 물었다. 3개월 전에 들은 사무용 소품 판매 준비는 어떻게 되어 가냐고. 관심을 가져주니 고마웠다. 그래서 이와 관련한 세부적인 내용을 구체적으로 피력했다. 현재, 판매율이 높은 타사 제품들의 디자인과 기능, 가격을 면밀히 분석, 검토해서...라고 말하고 있는데 'P'가 싹둑! 말을 잘랐다. '그래서 했어?' 라며. 난 자신 있게 답했다.
"응. 생각 중이야."
'P'가 버럭!! 했다. 아직도 생각 중이냐고. 이내, 밥 잘 먹여 놓고 자기 부하 직원 잡 듯 날 잡았다.
공예품 만드는 것도 아니고, 이게 3개월씩이나 걸릴 일이냐, 구구절절 옳은 말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반박하지 않았다. 밥값이니까. 10분 정도 지났을까, 휘몰아치는 쓴소리에 정신이 몽롱해지길래 고개를 살짝 돌려 창밖을 봤다. 귀에선 피가 날것 같은데 한낮 햇살은 평온하게 눈부셨다.
"제발, 생각 그만하고 일단 해!"
'P'가 쓴소릴 마쳤다. 그런데 대미를 장식한 이 말에 정신이 번쩍했다. 맞다. 난 차아암 생각이 많다. 곱씹어 보면 세상 쓸데없는 생각들로 항상 시작이 더뎠다. 목공을 처음 배울 때도 그랬다. 정말 좋아서 하는 걸까? 막상 했는데 적성에 안 맞으면 들인 돈이 아까워 속상할 텐데, 이걸로 창업하면 먹고살 수는 있나? 돈 벌이 될 만한 걸로 배우는 게 났지 않을까? 등등. 목공방을 알아보는 과정에서 한 생각들이다. 단 한 번의 체험도 없이 이딴 잡스런 생각만 하고 있었으니. 결국, 5개월을 허비하고 나서야 목공방을 등록했다.
생각이 많으면 몸이 둔해진다고 했던가. 언제까지 시간만 좀 먹으며 밍기적 거릴 순 없을터. 'P'의 쓴소리가 드디어 날 각성시켰다. 생각의 힘으로 굴러가는 건 아무것도 없음을.(염력을 쓰는 X맨은 빼고) 고로 행동해야 함을. 깨달았으니 지체 없이 실행했다.
"미니 탕수육 좀 사줄래."
제작 경과를 지켜보겠다는 쓴소리 대마왕을 36계로 물리치고 공방으로 돌아왔다. 당연히, 미니 탕수육은 못 먹었다. 하지만 이유는 알았다. 다른 친구들은 크던 작던 'P'의 보험에 가입했는데 난 아니었기 때문. 장사가 잘 돼서 내가 보험에 가입하면 그땐 무조건 미니 탕수육 추가라나. 역시, 밥 잘 사주는 매우 고마운 친구 'P'는 사려 깊게 치사했다.
'P'의 쓴소리에 망설이고 있던 일 하나가 떠올랐다.
20년 전, 만화가의 꿈을 접으며 자연스레 그림도 접었다. 만화를 위한 작화였기에 그림만 계속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목공 관련 SNS를 하면서 우연히 펜화 작가들의 그림을 보게 됐다. 문득, 나도 이제껏 그렸다면 이 들 만큼은 그렸을 텐데, 회한이 깊었다.(배 아프게 부럽기도) 이러던 와중에 관내 도서관에서 진행하는 어반 스케치 강좌가 눈에 띄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해 보자, 하다가도 문제는 또, 그놈에 생각이었다. 분명히 가벼운 마음이라 했거늘, 생각은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그림 작가가 될 것도 아닌데 그려서 어디에 써먹지? 일하면서 그릴 시간은 될까? 근데, 이걸로 돈은 벌 수 있나? 등등. 좌고우면, 한 달을 이러고 있는데 참으로 시의 적절하게 'P'가 와주었으니. 생각을 냅다! 멈추고 수강신청을 했다.
내 거지근성이 매우 흐뭇하게도 수업료와 재료비(스케치북, 피그먼트펜)가 모두 무료였다.
수업을 듣고 과제를 하면서 수강 전에 했던 생각들이 쓸데없는 기우였음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어디에 써먹을지, 일하면서 그릴 시간은 될지,는 의외로 간단하게 해결되었다. 이렇게 브런치 글감으로 써먹고, 그릴 시간은 하루에 두시간 남 짓이면 삼일에 스케치 하나는 충분히 나왔다. 본업에 저어언혀어~ 지장이 없었다. 이제 남은 건 돈은 벌 수 있나?인데.... 이건, 자신 있게! 자신 없다.( 마눌님께 사죄의 의미로 관 속에서 대가리 박고 영면할 듯)
돌이켜 보면, 뭐든 할 수 있는 기회와 시간이 많았었는데, 왜 그리 생각만 하다 놓치고 살았는지. 놓친 것 중에 눈물 나게 후회되는 건 시간이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진짜 늦은 거다' 란 개그맨 박명수의 명언을 사무치게 공감하며, 이 날 이후로 무조건 행동하고 있다. (그렇다고 생각 없이 저지르며 살고 있단 뜻은 아니고)
눈 떠 보니 반백살, 더 이상 낭비할 시간이 없다.
- 'P'가 지켜보겠다던 사무용 소품은 애초에 할 생각이 없었다. 하도~ 지랄 발광 쓴소릴 하길래 면피용으로 던진 것일 뿐. 그리고 작년 말, 'P'는 보험 일을 관뒀다. 애석하게도 미니 탕수육은 내 돈 주고 사 먹었다.
거지 근성에 지울 수 없는 오점으로 남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