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파민을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처럼 여기저기를 들쑤시다 보니 나의 알고리즘에 종종 뜨는 해외살이 게시물들이 있다.
주로 해외살이의 장단점, 해외이민을 간 이유, 어떤 방식으로 영주권을 취득할 건지 등등을 다루는 글이 많은데 그중에 자주 보이는 글이 “해외는 남 신경을 안 쓴다”라는 명제이다.
명제라고 한 이유가 있다. 이 말은 참일 수도 거짓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절반 정도는 맞다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한국인들이 말하는 “남 신경”에는 외적인 부분이 상당히 많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확실히 호주인들은 외적인 부분으로 남을 특별히 많이 평가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면 내가 다니던 이전 회사의 대표는 상당한 재력가임에도 불구하고 정말 다 떨어진 어디 벤더사에서 준 배낭을 메고 다녔다. '다 떨어진'이라는 표현은 과장이 아니다. 정말 구멍이 뽕! 하고 뚫려있었다. 가방이 가방으로서의 기능만 한다면 특별히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이 말이다. 또 그가 평상시에 입고 다니던 옷은 거의 회사의 로고가 새겨진 유니폼. 물론 이 부분은 회사 대표로서 마케팅적인 측면도 있긴 했겠지만. 또 그의 신발은 밑창이 다 닳아 없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신발을 사러 갈 시간이 잘 안 나서이기도 했고, 또 산다고 해도 그냥 원래 신던 그 똑같은 신발을 다시 살 사람이었다.
한국사람들이 터부시 하는 타투도 굉장히 많이 보이는 편인데 아주 잘 보이는 곳, 예를 들면 얼굴이라던가(!) 목을 죽 둘러서하는 문신이라던가(!) 뭐 그런 게 아니라면 특별히 뭐라고 하는 곳은 못 봤다.
여성의 경우는 그래도 조금은 더 신경 쓰고 다니는 분위기가 있긴 한데, 대부분은 그냥 깔끔하게 입고 다니는 정도고 디자이너 브랜드가 뙇 눈에 띄는 가방이나 옷들은 별로 못 봤다. 일단 호주가 유니폼을 많이 입는 문화이기도 하고 대다수의 경우 그냥 중-저가 정도에 형성되어 있는 일반적인 브랜드를 많이 쓰는 것 같았다. 사무직 남성의 경우도 비슷하고.
그리고 어떤 옷을 입더라도, 옷이 저렴해 보인다던지 말도 안 되는 패션센스를 가졌다던지, 심지어 빵꾸가 뚫려있더라도 이걸로 사람을 평가하지는 않는 것 같다. TPO에만 맞다면 말이다. (다만 법조계나 금융 컨설팅 계열은 복장규정이 좀 더 엄격하다. 거의 정장에 가까운 차림을 매일 하고 다닌다.)
그런데 지금까지 말한 예시는 모두 ‘회사에 출근할 때’를 전제로 한 이야기이다. 내가 느끼기에 호주는 TPO를 완벽히 따지는 곳이다. 회사 밖에서 포멀한 파티에 참석해야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래도 입고 갈 괜찮은 드레스나 구두, 수트쯤은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비단 옷차림의 문제뿐만이 아니다. 너무 말랐거나, 너무 뚱뚱하거나, 키가 작거나, 키가 너무 크거나, 기타 등등 여러 가지 외모적인 부분에 대한 언급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특히나 아주 친한 사이가 아니라면 농담으로라도 하지 않는다. 아, 물론 자기 자신의 외모를 가지고 자학개그 하는 경우는 있지만.
그렇다면 정말로 남 시선 신경을 하나도 안 쓰는 것일까? 정말 요만큼도?
아니다.
사람 사는 곳 어디나 다 비슷하다. 호주 사람들도 누구누구네 동네 집값이 얼마나 올랐고 누구 누구네는 애들을 엄청 비싼 사립학교를 보내고 누구 누구네는 휴가로 해외 어디를 몇 박으로 가고... 뭐 그런 얘기들 여기도 다들 한다. 다만 한국처럼 정말 "다들"하는 게 아니라 어떤 일정 socio-economic status (사회경제적 지위)인 사람들이 주로 이런 이야기들을 한다.
전 회사 디렉터 중 하나가 정말 정신없는 아침을 보냈다며 아침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을 쭉 이야기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글쎄 차 좌석 틈새로 카드가 빠졌는데 내 다이아 반지가 너무 커서 틈에 손이 안 들어가는 거야!"
이 농담은 나름 호주에서 유명한 농담(?) 중에 하나지만 정말이기도 하더라며 그녀는 왕 다이아 반지를 낀 손가락을 척 들어 보였다.
이와 같이 은근슬쩍 돌려하는 자랑들을 얼마나 많이 하는지, 어떤 네트워킹 자리에서 만난 중년의 남자 변호사 하나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아직 애가 없다고? 다행이네! 애 하나 키우는 게 페라리 한대 값이라지? 애들만 없었어도 난 페라리 세대는 샀겠어. 사립학교 학비는 일 년에 XXX달러는 들고 애들 뭐 시키는 거는 또 어찌나 비싼지"
이 말인즉슨 그는 굉장히 비싼 사립학교에 자녀를 보낼 수 있는 privilege 가 있다는 의미였다. (사립학교 이야기는 할 말이 많으니 나중에 다시 따로 글을 쓰기로 해본다.)
이 외에도 예시는 무궁무진하게 많다. 예를 들면 최근에 집 레노베이션을 하는데 고르는 것 족족 옵션 중에서 제일 비싼 거더라며 레노를 할 수 있는 재력 및 본인의 고급진 취향을 동시에 과시하는 사람도 있었고 본인 지인을 은근슬쩍 자랑하면서 본인도 그 같은 급(?)에 있는 사람임을 과시하는 사람이라던가... 뭐 생각보다 이런저런 사람들이 여기도 많다.
당연하다. 호주도 다 사람 사는 곳이다. 한국이 아니라고 해서 그 모든 사회적인 시선으로부터 완벽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해외에, 호주에 가면 왜 남 시선을 안 쓰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내 생각은 첫 번째로는 호주에는 위에 예시를 든 바와 같지 않은 사람도 꽤 많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는 나와 같은 이민자들이 흔히 말하는 그런 호주의 주류(?) 사회에서 조금은 떨어져 살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첫 번째 이유를 좀 더 짚어보자면, 일단 호주에는 저런 물질적인 것으로 사람을 나누는 데 아예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꽤 많이 존재한다는 얘기를 해야 한다. 그들은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벌고 스트레스 덜 받고 살고 맛있는 것 먹고, 그런 눈앞에 보이는 확실한 행복에 집중한다. 실제로 꽤 즐겁게 지내는 것 같고 은근히 아이들도 많이 낳고 잘 키운다. 호주의 최저 임금이 높기 때문이기도 하고 흔히 말하는 블루칼라 직업이 돈을 정말로 잘 벌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떤 직업을 가지든 크게 개의치 않고 뭘 하든 앞가림하고 살 수 있으면 그만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에 한몫 더하는 것이 나이 들어서도 새로운 것을 배우거나 새로운 직종에 도전하는 것이 한국보다는 상대적으로 쉽다는 점이다. 지금은 어떤 일을 하고 있지만 나중에 그 일이 싫어지면 다른 일을 새로 배워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부담이 덜한 것이다.
두 번째 이유로 든 주류사회이야기는 사실 앞서 말한 첫 번째 이유와는 서로 굉장히 배치되는 이야기이다. 많은 이들이 저렇게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사는데 집중을 한다면 도대체 호주의 주류 사회란 뭔데?
그러게 말이다.
나는 그래서 주류사회라는 말보다는... socio-economically advantaged people이라는 말도 안 되게 긴 표현을 사용하고 싶다. 나와 같은 이민자는, 특히 이민자 1세대는 socio-economically advantaged group에 들어갈 확률이 떨어진다. 돈이야 사업으로 많이 버는 경우가 왕왕 있지만 학창 시절부터 쌓아온 그들의 인맥 네트워크 안에 들어가기란 어려운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그런 그룹에 속할 생각이 없고 생각이 있다 하더라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테스트해보지 않았다.) 내가 겪는 일은 언제나 나에게만 유효한 아주 단편적인 부분이다. 그리고 때때로 이민자가 겪을 수 있는 부분이란 그리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이유로 한국에서 외국으로, 호주로 나온 사람들이 비교적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다고 느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더해 언어가 100% 편하지 않으니 타인의 비교 섞인 코멘트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가능성이 높기도 하고.
이유불문하고 내가 선택한, 나에게 마음 편한 곳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특권이다. 일단 나는 그 특권을 마음껏 누리고 있다. 다만 혹시 누군가 이 글을 읽는다면 세상 어디에도 완벽한 에덴동산은 없다는 것을 알아두길 바라는 바이다. 태어난 곳에서 이역만리 떨어진 곳에서 모든 걸 다시 시작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