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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토 Oct 09. 2024

호주, 그들이 사는 세상

1. 호주, 그들이 사는 세상


앞선 글에서 말했던 것처럼 호주에 적당히 벌고 스트레스 덜 받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최근 설문에 따르면 응답자의 무려 45%에 달하는 호주인들이 통장에 $1000 이하의 저축액이 있다고 밝혔다고 한다. (https://www.9news.com.au/national/millions-of-australians-less-than-1000-dollars-in-savings/95fa1f5e-4bc1-41a7-98af-0b457e35fed9)

월급의 몇 퍼센트를 저축해야 좋은 거냐고 묻는 평범한 한국인의 관점에서는 저축통장에 단돈 $1000, 한화로는 백만 원이 채 안 되는 금액만이 들어있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울 것이다.

호주의 빅 4 은행 중 하나이자 나의 주거래 은행인 Westpac에서 발표한 자료는 그래도 조금은 더 현실성(?) 있다. 그래봐야 20~30대의 저축액 중윗값이 대략 $3000 정도라고 하니 한국인의 기준으로 보면 깜짝 놀랄 일이 아닐 수 없다.


https://www.westpac.com.au/personal-banking/solutions/budgeting-and-savings/savings/savings-by-age/


비록 "super saver"들이 있어 평균값을 견인해주기는 하지만 중윗값이 너무나 낮은 관계로 호주에서도 기사화될 정도로 문제가 대두되었는데 최근 들어 인플레이션이 지속되면서 이런 현상이 더욱 심화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를 떠나서 호주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느긋 'laid back' 하기로 유명하고 소비에 있어서도 이런 영향이 없지 않아 있기는 하다는 생각이 든다. 딱히 아껴서 돈을 쓰는 느낌은 아닌 듯한 느낌이었달까? 옆에서 지켜본 호주인들은 특별히 뭘 과소비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어째서인지 다음 주급을 받기 전까지 통장에는 남은 금액이 얼마 없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서인가 호주에 와서 생활하다 보면 호주인이 상점에서 뭘 계산하면서 잔액 부족이 떠서 급히 saving account에서 돈을 옮기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보통 한 달마다 "월"급여를 받는 한국과는 다르게 보통 매주, 혹은 2주 만에 "주급"을 받는 사회라 그런가 소비 사이클이 조금 더 빠르게 느껴지는 것도 한몫하는 것 같다. 일단 수중에 돈이 떨어져도 조금만 더 버티면 다음 주급이 나오면서 리셋되다 보니 돈을 예상보다 조금 더 써버려도 살만하다는 착각(?)이 드는 것이다.

최근 들어 이런 차이점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전에는 2주마다 급여를 받았는데 이직 후에는-호주 회사 치고는 상당히 드물게-월급이라서 돈이 자꾸 없어지는 느낌이 든다. 고정비, 예를 들면 사보험이나 헬스장 멤버십 같은 것들이 매주 혹은 2주마다 나가게끔 설정되어 있어서 나가는 돈은 자꾸 나가는데 들어오는 돈은 없는 듯한 착각이 드는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호주인들이 돈을 펑펑 쓴다는 얘기는 절대 아니고 당연히 여기도 열심히 아끼고 예산 안에서 쓰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기는 하지만 위의 기사나 자료에 따르면 다수의 사람들이 저축은 엄두도 못 내고 살고 있는 것 같다.


2. 호주, "그들"이 사는 세상

그런 반면, 저 평균을 끌어올려주는 "super saver"들이 공존하는 사회가 바로 호주 사회이다. 한국에서 소위 말하는 "금수저" 친구들이 이에 해당한다. 나도 이곳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다니지 않았고 자녀가 없는 관계로 짐작만 할 따름이지만 호주 학교는 은근히 엄격한 구석이 있다. 교복, 신발, 양말, 모자, 가방, 심지어 머리끈까지 다 정해진대로 하고 다녀야 해서 대놓고 비싼 디자이너 브랜드를 휘감고 다닌다던가 하는 식으로 티가 나진 않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학교 자체에서 티가 난다. 바로 호주의 "그사세"를 존속시키는 큰 기둥 중 하나인 사립학교 인맥이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호주의 학교도 크게 공립학교와 사립학교로 나눌 수 있다. 사립학교에는 카톨릭 학교와 같은 종교 계통의 사립학교도 있는데 이들은 사립학교보다는 학비가 조금 저렴하고 꼭 해당 종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입학이 가능하기는 하여서 일부에서는 이를 "준 사립"이라는 말로 부르기도 한다.

사립도 사립 나름이긴 하지만 호주의 그사세 금수저 친구들이 다니는 학교는 학비가 엄청나게 비싸다. 내가 있는 브리즈번에서 가장 비싼 학교 중 하나인 Brisbane Grammar School을 보면 현재 기준으로 중-고등학생 (Year 7 - Year 12)의 학비는 연간 $32,760이다. 대략 1년에 3천만 원 정도가 그냥 학비만으로 나가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냥 학비만 비싼 것이 아니다. 입학 자체가 어렵다. 한국인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시험을 쳐서 입학해야 해서 힘든가? 하면 그렇지 않고 대다수는 인맥과 선착순(?)의 콜라보로 입학이 결정된다. 가족 구성원 중에 (혹은 가족과 아주 친한) 누군가가 그 학교의 졸업생일 경우 조금 더 이점이 있고, 형제자매 중에 누군가가 이미 그 학교를 다니고 있을 경우는 또 조금 더 이점이 있다고 들었다. 그리고 일단 빨리 리스트에 등록시켜 놓는 것이 좋다고들 한다. 그래서 일단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입학 리스트에 등록시켜 놓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아무튼 이런 연유로 확률적으로 이미 좋은 사립학교를 졸업해서 잘 살고 있는 금수저 가정의 자녀가 계속해서 좋은 사립학교를 다닐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들만의 리그를 더욱 강화시켜 주는 장치로 학교들끼리의 "association"이 있다. 몇몇 개의 사립학교들끼리 뭉쳐 그들끼리 스포츠 경기, 토론대회, 체스 경기 등을 하며 경쟁과 친목을 함께 도모하는 연합인 것이다. 이곳 브리즈번에는 대표적으로 "GPS"라고 통칭되는 9개의 남학교가 있다.

이렇게 알게 모르게 사회경제적으로 위치가 비슷한 친구들만이 주변에 있게 되고 그들끼리 친하게 지낼 수밖에 없는 환경이 조성된다. 한국에서는 "학연"이라고 하면 보통은 대학교 동창을 의미하는데 호주에서는 고등학교 학연이 꽤 중요하다.

그렇게 알게 모르게 이미 그룹화된 데에다 졸업생들끼리 서로 끌어주고 당겨주는 네트워킹까지 더해지니 그들만의 세상은 더욱 공고해진다.

앞선 글에서 밝힌 "글쎄 차 좌석 틈새로 카드가 빠졌는데 내 다이아 반지가 너무 커서 틈에 손이 안 들어가는 거야!"라는 발언을 한 사람의 자녀들이 GPS 학교 중 하나인 아주 비싼 사립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물론 본인이 자랑 아닌 자랑을 돌려 돌려 에둘러 말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같은 호주 하늘 아래에 살고 있어도 누구는 저축액이 한 푼 없이 지내고 누구는 타인에게 본인 자녀의 학교와 학업 성취를 자랑하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호주사람들은 남의 시선 하나도 신경 안 쓴다!' 내지 '호주 사회는 그렇지 않다!'는 말에 동의할 수가 없는 것이다.

적어도 겉으로는 다양성을 존중하지만 속으로는 보수적이고 은근하게 타인을 내려보는 태도를 가진 사람들도 제법 많다. 예를 들면 호주에서 아주 큰 타투가 있는 사람을 하고도 많이 보았지만 저런 그룹에 속한 사람이 타투를 한 건 본 적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자유로운 호주의 이면에 이런 은근히 보수적인 사회가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호주에서 지낸 시간은 기껏해야 N년. 두 자리 수로 넘어가려면 아직도 몇 년이나 남았다. 내가 이 사회의 안과 밖을 모두 경험했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에 늘 강조하듯 이 모든 이야기는 나의 개인적인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 글을 통해 한 가지 말하고 싶은 바가 있다면 지난 글에서도 밝혔듯이 호주사회는 한국과 아주 동떨어진 무슨 에덴동산과 같은 사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다 비슷비슷하다. 그것이 호주이든 한국이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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