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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사랑 Aug 16. 2024

혹시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진 않나요?

치열한 자기 해체 ② 가스라이팅 체크


진정으로 주체적인 삶이 맞나?


나는 분명 유년기 때부터 상처 많은 역사를 이어 왔지만 어떻게든 악착같이 그 불행을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쳤다. 단 한순간도 헛되이 살았다가는 그냥 나락으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최소한의 안전망’. 그것이 없었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 최고의 성취를 내기 위해 어떤 일이든 성실히 임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사실은 내가 여태껏 어떠한 성취를 손에 넣기 위해 해왔던 노력의 본질적 목적은 모두 ‘인정받기 위함’에 있었다.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맹목적으로 노력했던 것은 순전히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한국 교육 시스템의 압박과 안정적인 직업을 원하는 가족을 위해서였다.


청소년 시절 내 꿈은 오히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에 훨씬 가까웠다. 고등학교 2학년 담임 선생님이 부모에게 직접 전화해 ‘미대를 보내셔야 한다’고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물론 이 말을 들은 부모는 노발대발했다.) 친척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모두 내 성적에 대해 왈가왈부할 때마다 공부보단 그림이 너무 그리고 싶었던 나는 그 자리에 앉아 아무 말 없이 펑펑 울기도 했다.


가스라이팅은 참 오랫동안 이어졌던 것 같다.


“이젠 네가 우리 집의 가장이야.” “오빠가 저러니까 너라도 좋은 직업을 가져야 해.” “너는 직장에 다닌다는 애가 돈을 이거밖에 안 가져왔니?” “참 돈 안 되는 짓만 한다.” “네가 자식이면 집 한 채는 얻어 줘야지!” “너는 자식의 도리를 안 하니 사람 대접 받을 생각 마.” “한 번이라도 가장 역할을 해 보고 유세 떨어!” “넌 악마의 자식이야.” “너 같은 애가 무슨 글을 써?” “배때지가 처불러서 정신과엘 다니지.” …


오직 피해자만이 그 사실이 있었음을 선명히 기억하는, 폭언과 폭력의 시간이었다. 내가 공개하지 않으면 영영 묻혀서 사라져 버릴 진실. 글이란 그런 점에서 참 강력한 흔적이자 무기이다.


나는 모욕적인 대우를 받았지만 가족과 연을 끊지 못했다. 일말의 달콤한 친절 그리고 동정심에 도로 발 돌리기를 수차례. 엄마는 내게 저런 말을 하며 날 때린 것을 한순간도 기억하지 못했고, 진심으로 사과한 적도 없으며, 오히려 “화났을 때 한 말을 왜 일일이 기억해서 또 분란을 일으키니?” 하면서 내가 유별나고 이상하다는 식으로 몰아갔다.


내가 정말 머리가 이상한 걸까 싶은 마음에 녹음까지 했었는데, 당시 상담 선생님이 그 녹음 파일을 듣고 경악을 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자긴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며, 너무 억울하다며, 국민 재판을 열면 네 편을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고 했다.


엄마에게 힘든 이야기를 하면 언제나 뭐 그 정도 가지고 그러냐며, 자기는 더 힘들었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흘러갔다. 살아생전 나는 다른 집 부모와 우리 집 부모를 비교한 적이 없는데 엄마는 입만 열면 다른 집 자식과 날 비교했다. 누구는 뭘 해 줬다더라, 누구는 결혼해서 애까지 낳았다더라.



넌 뭐가 부족해서 그걸 못 하니?



그 말 한마디의 족쇄를 발목에 차고, 난 설레지 않는 삶으로 계속해서 끌려갔다.


어려서부터 나는 어디에도 내가 가진 생각을 말할 데가 없었다. 사실 진짜 문제는 모든 걸 내던지고 자살해 버린 아빠와 알콜의존증이었던 새아빠와 이 모든 것 때문에 철저히 망가진 엄마 그 자체만은 아니었다. 날 더욱 절망하게 했던 건 그나마 살아 있는 엄마가 변화할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고, 엄마가 날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별개로 내가 더 이상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어느덧 서른이 될 때까지도 내 무의식의 뿌리에는 이런 마인드가 박혀 있었다. ‘내가 조금 더 노력해서 연봉이 높은 회사를 가야 우리 엄마랑 오빠가 편해.’ ‘내가 가진 역량으로 갈 수 있는 가장 좋은 회사가 어디일까?’ ‘이 정도 월급이면 다달이 이만큼은 보낼 수 있겠다.’ …


무수한 상처를 입고, 독립을 한 지 수년이 지났음에도. 가스라이팅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나는 언제나 모든 결정의 기준을 내가 아니라 가족에 맞추며 살고 있었다. 불쌍한 엄마를 위해. 장애를 가진 오빠를 위해.


나는 자유를 가진 고유한 인격체가 아닌, 오직 내가 선택하지도 않은 가족의 안위만을 걱정하며 살아야 하는 종속적 개체인 것만 같았다. 정말로 내가 원하는 삶이 뭔지, 내가 꿈꾸는 이상이 뭔지를 판단하고 그것을 실현할 방법을 궁리할 기회조차 없었다. 그러니 어떤 직업을 가져도, 어떤 직장에 가도 본질적인 만족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떠올리면 행복이나 의지나 애틋함이 아니라 부담과 책임감과 슬픔만을 상기하는 관계를 비로소 벗어나 보기로 다짐하니 견고한 가스라이팅의 고리가 느슨해졌고, 그 틈으로 내 안의 진실한 영혼이 마침내 탈옥하여 외친 것이 아니었을까?


‘가짜 인새애애애앵!’


사실 이런 이유들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삶의 어떤 부분에서도 진정으로 만족되고 충족되는 느낌을 받지 못한다면, 심지어는 그러다 못해 자기파괴적인 감정을 느끼는 지경까지 이르렀다면,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이 정말 ‘나’를 위한 삶인지 고민해 볼 이유가 충분하지 않을까?



‘책임라이팅’ 벗어나자


미국의 인기 작가 마크 맨슨은 한국을 방문한 뒤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이렇게 진단했다. “유교의 단점인 수치심shame과 비판judgement 그리고 자본주의의 단점인 현란한 물질주의materialism와 돈벌이money만을 답습한 사회”.


맨슨은 불과 몇십 년 만에 과학, 기술, 교육, 엔터테인먼트, 스포츠 분야에서 세계를 선도하게 되었음에도 불안, 우울증, 알코올 중독 및 자살율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 한국에 방문하게 되었다고 한다.


영상의 첫 장면에서 마크 맨슨은 묻는다. “사회가 당신을 우울하게 만들 수 있나요?” 이 영상을 보고 또 봤지만 나는 여전히 이 질문이 이해되지 않는다. 그에게 반문하고 싶다. “사회 때문에 우울하지 않은 나라가… 존재하나요?” 그런 건 낙원에만 있는 것이 아닌가 해서.


슬프게도 한국은 유교의 가장 나쁜 부분인 (가족을 위해 희생할 의지나 능력이 적을수록 받는) 수치심과 비판을 유지하면서 가장 좋은 부분인 가족 및 지역 사회(family & community)와의 친밀감은 버려둔 것 같다.

한편 그들은 자본주의의 최악의 측면인 현란한 물질주의와 돈벌이에 대한 노력을 채택한 반면, 자본주의의 가장 좋은 부분인 자기 표현과 개인주의(self expression & indivisualism)는 무시했다.

이러한 상충되는 가치관의 조합이 아마도 엄청난 스트레스와 절망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 — 마크 맨슨


유교 가치를 추구하여 가족에 대한 ‘천륜’을 깨뜨려서는 안 된다는 말을 규율처럼 지키고 따르며, 타인의 삶을 옳다고 정해진 사회적 기준을 잣대로 쉽게 판단하는 사회. 그러면서도 초고속 성장 사회의 부작용으로 형성된 경쟁적인 분위기로 인해 ‘돈’을 행복의 1순위로 꼽는 나라.


OECD 전체 자살률 1위, 청소년 자살률 1위, 엄청나다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소득 격차와 교육 격차, 그러나 우울증 치료율은 최저인 나라. 저출산에 대해서라면, 전 세계 석학의 이목과 걱정이 집중 조명될 정도로 희망이 없다. 이 나라는 이미 준전시급 재난 상태나 다름없다.


이 사회에는 분명 나처럼 부모의 압박, 가족에 대한 책임감, 어떻게든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한다는 불안감 등으로 진정 나를 위한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것들을 그저 족쇄로 취급하며 완전히 벗어나자는 뜻이 아니다. 내가 나에게 주어진 ‘책임’들을 투명하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우선 체크해 보아야 한다. 무의식중 각인된 책임감은 때때로 폭력성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교 사상으로부터 비롯된 맹목적 ‘효도’라는 이념은 현대 사회에서는 많은 경우 폭력으로 변질되어 작용한다.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사회문제로 다루어져야 한다고 생각될 정도다. 실은, 어째서 이 폭력적이며 한 생명의 인격을 도구화하는 끔찍한 문제가 아직도 고유한 사회문제가 되지 않는지 의문스럽다. 혈연으로 이어진 소규모 경제 단위로서의 핵가족 시스템은 아마도 한국에서는 실패한 것에 더 가깝지 않을까 한다.


넘치는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것은 괜찮다. 혈연이 아닌 사람과도 충분히 많은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다. 그러나 ‘자식의 도리’라는 말을 휘둘러 애정과 물질을 착취하는 행위는 몹시 기괴하다. 다른 가정의 구성원과 비교해 압박하는 행위 역시 올바르지 않다. 이런 가스라이팅을 당하며 성장한 피해자는 진정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언젠가 우리나라를 이끌어 갈 미래의 새싹들을 이미 다 자라서 새싹을 지켜줘야 할 나무들이 짓밟고 있다. 국가 유지 차원에서도, 기성 세대의 청년 착취는 멈춰야 한다.


무엇보다 ‘내가 행복하지 않은 관계’는 설령 혈연이라고 해도 멀어짐이 맞다. 내가 나의 영혼을 지키지 않으면 누가 지켜준다는 말인가? 내키지 않는다면, 사랑하기는커녕 불행하고 괴롭기만 한다면,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 단언컨대 우리는 그 무엇도 책임질 의무 없이 태어났다.


부디 ‘책임라이팅’에서 벗어나 영혼을 해방시키자. 케케묵고 실체도 없는 옛 이념에 종속되어 이 세상의 미래인 나 스스로를 고통받게 하지 말자. 그것이 영혼 살림의 첫 단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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