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단어 ritual은 '(항상 규칙적으로 행하는) 의식과 같은 [의례적인] 일'을 의미한다. 리추얼은 관계의 기초를 튼튼하게 다지며, 매일의 일상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풍성하게 채워줄 수 있다. 거창한 의식이 아니라도 좋다. 리추얼은 그것이 사소한 행동이라도 부부가 규칙적으로 반복하다 보면 사소한 순간을 특별하게 만들며, 서로의 관계를 돌보는 지지대 역할을 한다. 매일 아침 식사 함께 하기, 퇴근 후 산책, 예능프로그램 같이 보기 등과 같은 일상의 작은 일들을 규칙적으로 반복하며 부부의 시간과 공간을 채우는 행위가 바로 리추얼이다.
우리 부부도 리추얼이 있었다. 크리스마스이브마다 함께 뮤지컬을 보러 가기, 12월 31일 마지막 밤 카운트다운 행사에 함께 참여하기, 퇴근 후 '나는 솔로' 함께 시청하기 등이었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아끼던 리추얼은 바로 술이었다.
연애시절, 그녀와 나는 같은 직장에 근무하였다. 신설 기관에서 몇 안 되는 인원으로 일을 꾸려 나가다 보니 업무 강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정규 근무시간이 9시간이라면 우리는 매일 4시간 이상 초과 근무를 했다. 수당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초과 근무 시간이 한 달에 약 60시간 정도 되는데, 주말에도 출근하면서 이를 훌쩍 넘기는 달도 더러 있었을 정도로 업무는 힘들었다.
사람들이 업무에 지쳐 힘들 때는 어디에 기대는가? 바로 사람과 술이다. 나는 내 사람이 바로 옆에 있었기에 그녀와 함께 술에 기대어 지친 일상을 위로받을 수 있었다. 아무리 힘든 날이어도 퇴근 후 그녀와 호프집에서 500cc 생맥 한 잔을 원샷하는 순간 모든 피로가 사라졌다. 그녀 또한 그랬으리라. 우리는 젊었고, 우리는 마주하는 모든 어려움을 함께 헤쳐나갈 자신이 있었고, 우리는 서로 사랑했다. 그녀와 함께 하는 공간, 그녀와 함께 마시는 술, 그리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대화는 내 삶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결혼 후에도 신혼을 즐기기로 결정하면서 우리의 술 리추얼은 한동한 지속되었다. 함께 맛집을 찾아가고, 새로 나온 술을 마셔보고, 시답잖은 가십으로 깔깔대며 보내는 순간들이 그때는 영원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이를 갖기로 결정하고, 오랜 기다림 끝에 소중한 생명이 아내의 뱃속에 자리 잡고 나서는 우리 부부의 술 리추얼은 더 이상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술이야 다른 사람들이랑 마시면 되고, 리추얼이야 다른 것을 만들면 되는 것 아닌가?'
오산이었다. 아내와 마시는 술자리는 가정의 평화를 가져다주지만 다른 사람들과의 술자리는 가정에 불화를 가져왔다. 함께 책 읽고 독서 토론하기, 아침 산책하기, 주말 저녁에는 영화관 가기 등 여러 가지 리추얼을 시도해 보았지만 허사였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부부가 함께 반복적으로 행할 수 있는 일이 생각보다 많지 않음에 놀라는 날의 연속이었다. 생김새도, 성별도, 생각도 다른 사람들이 일상에서 공통된 관심사를 바탕으로 정기적으로 즐길 수 있는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억지로 시도하는 일들은 오래가지 않았다.
국어 전공자인 아내를 배려해 고전 문학 서적을 한 달에 한 권 함께 읽고 토론하는 시간을 정기적으로 갖자고 제안하였는데 아내는 그동안 전공 서적을 얼마나 읽었는데 집에서도 읽어야 하냐며 거부의 뜻을 밝혔다. 내 특기인 테니스를 가르쳐 보고자 아내와 함께 테니스를 배웠을 때도 반응은 심드렁해서 한 달 만에 그만뒀다. 주말마다 카페 투어를 하자는 제안에도 얼마 동안 함께하는 듯싶더니 주말은 집에서 쉬고 싶다고 해서 흐지부지 되었다.
"오빠, 오빠가 나랑 같이 하고 싶은 것들이 많은 건 알겠는데, 부부라는 게 꼭 함께 해야만 하는 리추얼이 있어야 부부는 아니잖아?"
나의 다양한 시도에 피곤해진 그녀는 한 마디를 던졌다.
"꼭 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부부사이에 '우리 부부는 이럴 때는 항상 이걸 해'와 같은 리추얼이 있다면 더 좋지 않을까? 사이도 더 돈독해지고 말이야."
내가 무적의 논리어 '그래도'를 포함시켜 말했다.
"뭐 좋긴 하겠지만 나는 억지로 뭘 하려고 하는 것보다 그냥 오빠랑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좋아. 그리고 우리가 그나마 반복적으로 즐기는 일들도 아마 덕복이 태어나면 송두리째 바뀔걸?"
그녀의 말이 맞았다. 곧 엄청난 녀석이 찾아올 것이었다.
"그래, 그렇겠지. 그래도 나는 자기랑 뭔가 함께 많은 것을 해봤으면 좋겠어. 물리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공유하는 것이 많아야 부부잖아? 우리 술 같이 마셨던 그날이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
내가 미끼를 던졌다.
"내가 임신했는데 어떻게 마셔? 그리고 오빠는 친구들이랑 나가서 마시면 되지!"
그녀가 미끼를 물었다.
"힝, 난 자기랑 마시는 게 더 좋은데. 예전에 우리 막 서로 취해서 술집도 다 닫았는데 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편의점에서 술 사가지고 공원 정자에서 술 마신 거 기억나? 그때 너무 마셔서 정자에서 잠들어버렸잖아! 그땐 정말 젊었지. 추억이다 진짜."
"맞아 추억이다 진짜."
그녀를 향수의 늪에 빠트리는 데 성공했다. 이제 방아쇠를 당길 차례이다.
"아 그러고 보니 이따 20시에 익준이가 보자고 하더라고. 오래간만에 한잔 하자는데 갔다 와도 될까?"
"그래 그러셔. 대신 일찍 들어와야 해?"
성공했다. 내가 작전을 펼치고 아내가 기분 좋게 허락해 주는 이 순간 또한 우리 부부의 리추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 부부란 이런 것이지. 결혼 전에는 그냥 나가면 되는 술자리를 이렇게 어렵게 아내의 허락을 얻어 나가야 하는 것이지, 암, 그렇고말고.'
이 상황에 딱 어울리는 영어 단어 bittersweet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유부남 동지들아, 나는 술 마시러 나간다. 행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