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육아 모임이 하나 있다. 부부끼리 모두 같은 직종에 근무해 서로를 모두 잘 알고 친해서 만남이 잦은 편이다. 신기하게도 그 모임의 남자들은 모두 같은 건물에서 몇 년 간 함께 근무한 경험이 있어 전우애가 끈끈하다. 아이가 생기기 전에는 술자리도 매우 자주 격하게 가졌으나, 모두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가지게 되자 술자리 자체도 줄었고, 남자 구성원 전원이 한 장소에서 맘 편하게 술 마시는 날이 전무후무해졌다.
그날도 한 녀석이 빠진 채 우리는 술자리를 가졌다. 당연히 약속 시간 정시에 나오는 놈들은 나를 포함해 한 놈도 없다. 해가지기 전에는, 아니 엄마와 반드시 자겠다는 아이를 데리고 아내가 아이방으로 들어가기 전에는, 우리는 나올 수 없기에, 남자들은 아이가 잠자리에 들어간 순서대로 약속한 장소에 모인다. 그날따라 아빠랑 자겠다고 보채는 아이를 재우고 나와야만 했던 마지막 한 녀석이 콧물인지 눈물인지를 훔친 채 술집으로 뒤늦게 들어왔을 때, 우리는 그를 안아주었다.
첫 잔은 소맥이다. 소주잔을 사분의 삼 정도 채운 소주를 카스 맥주잔에 붓고, 카스 로고까지 맥주를 채우면 원샷용 소맥이 완성된다. 오늘도 고생했다고 서로를 다독이며 들이키는 첫 잔은 정말이지 꿀맛이다. 그렇게 두어 잔 소맥을 마신 후 각자 취향대로 술을 고르지만 결국에는 모두 소주를 마시게 된다.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면 시작된다. 천하제일 불만 대회가.
A: 내 얘기 좀 들어봐. 너네 만난다고 일주일 전부터 집에서 랩을 하고 다녔으면 당연히 오늘 내가 나가는 날인 거 알잖아? 그래서 오늘은 평소보가 빠르게 애랑 와이프 저녁해 주고, 나는 어차피 나가서 먹을 거니까 집청소 하고 설거지 돌리고, 빨래 개고 하면서 애기 씻으러 들어가면 나가려고 외출복 입고 대기하고 있었단 말이야. 근데 와이프가 갑자기 '지금 나가려고?' 이러면서 애기 목욕 끝나면 머리 말려주고 가라는 거야. 내가 저녁 8시에 만나기로 해서 지금은 나가야 한다고 말하니까, 맨날 보는 애들 좀 늦게 보면 어떠냐고 자기 일은 하고 가라는 거야. 아니, 언제 애기 목욕 하고 나서 머리 말리는 게 내 일이었냐고, 그리고 나는 와이프 저녁 늦게 들어왔을 때도 혼자 목욕시키고 혼자 머리 말리고 혼자 재우고 다 했는데, 와이프는 애기 목욕시키고 나면 옷이 젖어서 재우려면 자가정비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거야. 아니 그럼 오늘 나 약속 가는 거 알고 있으면 애를 좀 일찍 씻기던가. 저녁도 밍기적밍기적 한 시간을 먹이더니, 애기 씻기러 가는 것도 늦어져서 평소 같으면 19시 30분에는 씻기러 들어가는데 저녁 8시가 다 되어서 나한테 그 말을 하는 거야. 진짜 이건 일부러 그러는 거 같지 않냐? 와이프가 애 목욕시키는 거 진짜 한세월 걸리거든? 그거 기다렸다가 머리 말리고 하면 9시가 넘는데 이게 말이 되냐고. 그래서 어쩔 수 있냐, 내가, (한숨을 푹푹 쉬며) 내가 목욕시키면 빠르니까 결국 내가! 다 하고 나오느라 30분이나 늦었다. 진짜, 한 번을 재미있게 놀다 오라는 소리를 못 들어봤네. 아우, 마시자!
B: 에이, 한잔해. 형, 근데 형은 아무것도 아니네. 내가 일주일 동안 뭐 했는지 알아? 와이프가 인스타에서 뭘 봤는지 갑자기 온 집을 아이를 위한 환경으로 재구조화하자는 거야. 거실에 있는 소파랑 티브이를 모조리 치운다음 주변을 책장으로 둘러싸 독서 공간을 만들고, 방 한 칸은 아이 공부방, 다른 한 칸은 놀이방, 마지막 한 칸은 아이와 함께 잠자는 방으로 만들자는 거야. 이러면 내 공간은 어디 있냐고. 그리고 지금 방들 꾸민 지도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다시 가구 옮기고 방 꾸미고 하느라 나 죽는 줄 알았잖아. 다 아이를 위한 일이라고 하니 어쩌겠어. 그래도 마지막에 와이프가 허락해 줘서 거실 소파는 사수할 수 있었지. 그 넓은 집에 나만의 공간은 이제 소파 한 칸이 전부야. 아우, 마시자!
C: 훗, 가소로운 녀석들. 행복한 줄 알아라. 나는 오늘 일이 너무 힘들었어. 피곤해 죽겠어서 집 가서 잠시만 눕고 싶었는데, 퇴근하자마자 와이프가 고생했다는 소리도 안 하고 나보고 당근마켓 중고거래를 갔다 오라는 거야. 그래서 이번엔 또 뭘 샀냐고 하니까 책을 샀다는 거야. 아니 우리 아기 이제 6개월이야. 근데 집에 애기가 보는 책이 천 권이 넘어. 이거 솔직히 엄마 욕심 아니냐? 그리고 나는 책 당근으로 사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차라리 새책을 사주고 말지. 그래서 오늘 너무 피곤한데 그냥 그거 새책으로 사주면 안 되냐고 하니까 와이프가 이거 정가로 안 사서 다행인 줄 알라고, 토 달지 말고 다녀오라고 하는 거야. 이번 달에 수당 조금 들어오고 해서 그냥 사라고 얼마냐고 하니까 새 책 가격이 백만 원이라고 하더라. 그래서 차키 들고나가면서 카톡으로 주소 보내라고 했지. 근데 어딘지 알아? 여기 동네 주변이 아니고 다른 도시더라고. 우리 동네 근처에 올라오는 책 사면 안되냐고 하니까 그것도 없어서 못 구하는 거니 잔말 말고 갔다 오래. 나 오늘 차로 왕복 한 시간 반을 달려서 중고책 가져왔잖아. 그러니까 8시가 넘었더라고. 모임도 늦어서 부랴부랴 다시 나가려는데, 와이프가 애기를 안전가드에 넣어 놓고 애기가 볼 책이니 깨끗해야 한다며 거실 한쪽에 쭈그려 앉아 책을 닦고 있는 거야. 책이 40권이야. 어쩌겠어. 같이 앉아서 한 장 한 장 닦고 나오느라 늦었어. 아니 오늘 모임 있는 거 알면서 왜 오늘 내가 나가려는 시간에 책을 닦고 있냐고. 아우, 한잔하자!
D: 아우, 불쌍한 놈들. 그러니까, 결혼 생활은 나처럼 해야 하는 거야. 어디 여자가 남자 약속 있는데 토를 달아? 그냥 나갔다 올게 하고 나오는 거야, 하수들아. 오늘도 친구들 보러 갔다 온다고 하니까 12시 전에만 들어오라던데? 개꿀! 이러면서 나왔지. 너네 와이프가 그거 안 해주냐? 나는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면 현관문 앞에서 내 옷 받아주잖아. 그리고 무릎 꿇고 한 손에 핸드 타울 내밀며 '오셨습니까, 주군!' 이러면서 맞이해 주는데. 집에 오면 남편 일하고 와서 피곤하다고 애기는 자기가 다 보고, 내 밥도 따로 차려줘. 이런 생활을 해야지 이놈들아. 자자, 마시자!
A: 너 요즘 부쩍 힘든가 보네. 허언증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 (D는 실제로 허언증이 있다.) 그래도 우리가 낫다. 오늘 못 나온 놈도 있잖아. 하긴 뭐 아직 아기가 어리고 하니까. 아직 나올 때가 아니지. 걔들이 작년 이맘때쯤 결혼하고 애 바로 낳았지? 그럼 지금 애가 100일은 넘었으려나? D 너랑 연도는 다르지만 결혼 날짜는 비슷하다했잖아? 일주일 차이였나?
D: 어, 맞아. 내가 4년 전 이맘때쯤 결혼해서 애 바로 낳았으니까, 지금쯤이면 애기 100일은 넘었을걸? (잠시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 천장을 응시하더니) 악, 죽었다. 나 내일 결혼기념일이네. 나 먼저 간다. 아, 나 뒤졌다 진짜.
남은 우리는 술집을 달려 나가는 그 녀석에게 조의를 표하며 새로운 잔을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