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떠난 것이 올해로 딱 20주년이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웹툰에서는 19번의 인생도 사는 사람도 있다지만, 인생 1회차인 나에겐 영 알수 없는 길 들의 연속이었다...
조기유학도, 말도 못하며 간 유럽의 오래된 도시 곳곳을 두리번 거리며 종이지도를 의지해 더듬더듬 걸어가는 것도- 그리고 시월드가 뭔지 뼈저리게 느끼는 것까지도(!) 모두 다.
그동안 나는 만 15살의 고1 여학생에서, 35살의 두아이 엄마가 되었다.
20년의 타지생활동안 배우고, 느끼고, 때로는 억지로 알아가졌던 것들을 시간에 따라, 도시에 따라 적어내려가다보니 내가 겪었던 이것들에 대해 누가 프리뷰를 보여줬다면 조금 더 수월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유학, 이민, 결혼생활 - 인터넷에 정보와 의견이 차고 넘치지만 막연히 모르고 가는 것보다 누군가가 나와 비슷한 일도 당하고, 다양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면 마음에 위로가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으로 목차를 적어내려갔다.
이 이야기는 한 뚱뚱하고 미래가 안보이던 아이가 유학생활과 이민생활, 결혼생활을 하며 넘어지고 부딪치며 얻은 교훈들을 하나 둘, 풀어가는 과정이다. 하면 안되는 것과 해도 되는 것을 감히 당신과 나누고 싶다.
이 글을 지금 혼자라고 느끼는- 힘든시간을 보내며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다며 마음이 허전한, 그리고 이게 맞는 길인지 갸우뚱거리는 모든 사람에게 바친다. 당신, 혼자가 아니다.
1. 뉴질랜드에서
너는 왜 유학을 간 거야?
네가 유학 간 이유를 말해봐,라고 누가 물어본다면 나는 단연코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문장은 나의 진심 100프로를 반영하고 있다.
"나는 한국에서 잘 살아갈 자신이 없었고, 행복할 자신또한 없었어. 그래서 도망치듯 한국을 떠났어. 새로운 곳에서 새로 시작하고 싶었어."
나는 도망쳤다.
그래, 인정한 적이 20년 동안 한 번도 없지만.
이혼해서 따로 사는 다른 사람과 가정을 꾸리고 사는 성공한 엄마는 보는 것도, 그리고 그와 반대로 가게 뒤편의 쪽방에서 홀로 몸을 누이고 잠을 청하는 아빠를 모른 척하는 것도 더 이상은 싫었다.
겨우 다시 시작해 볼까, 하며 새 동네에서 새로 만난 40명의 여고 1학년에서 적응이 어려웠고, 그 사이에서 평균 70-80점을 받으며 늘 생각했다.
나는 아마 이 성적으로는 지방대학을 갈 수 있을 거야. 이게 내 현실이야. 나는 어차피 한국에서 좋은 대학 가기는 틀렸어. 딱히 잘하는 건 미술이랑 국어밖에 없고 이 평균점수 가지고는 지방대학이 최선일 거야...
나의 최선은 너무나 초라하다.
나는 지레 나를 믿지 못하고 빙빙 원밖만 천천히 도는 머리 숙인 아웃사이더 같았다.
어릴 적부터 꿈은 패션디자이너. 아홉 살 때 그 단어를 듣자마자 머리에 번쩍 번개를 맞은 듯, 숙명처럼 나는 패션디자이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정확히 20년 전, 나는 한국에서 뉴질랜드로 향하는 비행기에 동생과 둘이 올랐다.
2004년, 유난히 덥고 습했던, 여름이었다.
과대 포샵된 증명스티커 사진을 친구들과 하트쿠션을 들고 찍어대고 유행하던 집게 핀을 수집하던. 뽀글뽀글 파마에 '개눈'이라 불리는 서클렌즈를 즐겨 끼던 만 15세, 고1의 나와-
유행이라고는 알지도 관심도 없고 눈 시력은 2.0, 클릭비와 원타임 음악에 미쳤는데 공부는 전교 20등 안에 드는 만 13세 중1 부반장 여동생.
우리는 우연한 기회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뉴질랜드를 여름방학에 어학을 해본다는 이유로 가게 된다. 엄마는 가서 별로면 방학 끝나고 돌아와도 된다고 했다.
동생은 그런 줄 알고 가방을 단출하게 쌌고, 난 안 올 줄 느끼며 가방을 빵빵하게 쌌다. 우리는 쌍둥이처럼 티니위니에서 사준 핑크색 맨투맨과 베이지색 바지를 입고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 안에서 체스세트와 오목을 가져가 놀고 영화도 보며 10시간의 비행을 무리 없이 마쳤다. 그러나 그때까지 우리는 체감하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