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담해 Aug 30. 2019

나는 지금 무의 세계에 있다

무(戊)의 세계인가 무(無)의 세계인가

“네 나이가 몇이지?”
“스물아홉이요.”

퇴사를 앞두고 사장님이 물었다. 얼마나 일했느냐고 연이어 물으시기에 3년 몇 개월쯤 되었다고 답했다. 회사와 연이 닿은 지는 햇수로 5년째였다. 임용고시 준비하며 아르바이트부터 시작한 일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햇병아리인 내가 서른 코앞까지 달려가는 걸 봐왔단 소리였다. 이십 대의 절반을 그곳에서 보낸 셈이기도 했다.

“넌 네 청춘을 돈과 바꾼 거야.”

대화 끝에 그가 말했다. ‘그걸 알면 돈이라도 많이 주든가! 내 청춘을 이토록 저렴하게 이용하셨겠다?’라고 쏘아붙였다. 물론 속으로만... 겉으로는 어색하게 웃으며 “아하하, 그런가요?” 했다. 슬프게도 그는 갑이고 나는 을이었다. 퇴사를 앞둔 순간에도 나는 을의 가면을 썼다, 자연스럽게.

그 후 몇 개월간 프리랜서로 일했다. 프리랜서는 ‘갑을병정무...’ 천간 중에 ‘무’쯤 해당한다. 자유로운 시간은 내가 아닌 갑을병정 중 한 사람에게 주어진 듯했다. 오죽하면 프리랜서의 ‘프리’는 “내 시간을 ‘프리’로 쓰세요~” 하는 말에서 나온다고 할까. 오래 버티지 못하고 내근직 회사원으로 돌아갔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시작했던 프리랜서 생활이라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이번이 두 번째 퇴사다. 프리 선언을 했으니 두 번째 프리랜서의 시작이다. 아직 일은 안 하고 놀고 있으니 시작도 못 했다고 봐야 맞겠다. 이번에는 자의 100%인 프리랜서(프리랜서라고 쓰고 백수라고 읽는다), 다시 무의 인생이다.

갑자기 기억 저 멀리에 있는 첫 퇴사 면담이 떠오른 건 ‘시간’ 탓이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 본 적 없는 촌스러운 나라서, 아무것도 안 하니 불안해서, 시간, 시간, 시간... 시간 생각을 했다. 혹시 내가 시간만 축내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자꾸 들었다. 워런 버핏이 그랬다. “잠자는 동안에도 돈이 들어오는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당신은 죽을 때까지 일해야 한다.”라고. 그런데 나는 자는 시간뿐 아니라 남들 일하는 시간에도 돈 들어오는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저 놀고 있다.

부의 추월차선으로 달려가진 못할망정 서행차선*에서조차 이탈한 나. 무(戊)의 세계로 들어온 줄 알았더니 수입 없을 무(無)의 세계로 들어온 거였구나!

“그래, 원 없이 놀아라~”

외출하는 내 뒤통수에 대고 엄마가 말씀하신다. 엄마는 나를 잘 안다. 결국 제풀에 다시 일을 시작할, 제대로 놀지 못하는 나를.

이대로 괜찮을까 싶은데. 일단 오늘은 논다. 어제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논다. 책 읽고 글 쓰고 논다. 무(戊)가 될지, 무(無)가 될지, 진짜 무[무ː]가 될지 모르겠지만.







*추월차선, 서행차선은 <부의 추월차선>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엠제이 드마코 저, <부의 추월차선>, 토트, 2013

매거진의 이전글 걷기와 글쓰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