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戊)의 세계인가 무(無)의 세계인가
“네 나이가 몇이지?”
“스물아홉이요.”
퇴사를 앞두고 사장님이 물었다. 얼마나 일했느냐고 연이어 물으시기에 3년 몇 개월쯤 되었다고 답했다. 회사와 연이 닿은 지는 햇수로 5년째였다. 임용고시 준비하며 아르바이트부터 시작한 일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햇병아리인 내가 서른 코앞까지 달려가는 걸 봐왔단 소리였다. 이십 대의 절반을 그곳에서 보낸 셈이기도 했다.
“넌 네 청춘을 돈과 바꾼 거야.”
대화 끝에 그가 말했다. ‘그걸 알면 돈이라도 많이 주든가! 내 청춘을 이토록 저렴하게 이용하셨겠다?’라고 쏘아붙였다. 물론 속으로만... 겉으로는 어색하게 웃으며 “아하하, 그런가요?” 했다. 슬프게도 그는 갑이고 나는 을이었다. 퇴사를 앞둔 순간에도 나는 을의 가면을 썼다, 자연스럽게.
그 후 몇 개월간 프리랜서로 일했다. 프리랜서는 ‘갑을병정무...’ 천간 중에 ‘무’쯤 해당한다. 자유로운 시간은 내가 아닌 갑을병정 중 한 사람에게 주어진 듯했다. 오죽하면 프리랜서의 ‘프리’는 “내 시간을 ‘프리’로 쓰세요~” 하는 말에서 나온다고 할까. 오래 버티지 못하고 내근직 회사원으로 돌아갔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시작했던 프리랜서 생활이라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이번이 두 번째 퇴사다. 프리 선언을 했으니 두 번째 프리랜서의 시작이다. 아직 일은 안 하고 놀고 있으니 시작도 못 했다고 봐야 맞겠다. 이번에는 자의 100%인 프리랜서(프리랜서라고 쓰고 백수라고 읽는다), 다시 무의 인생이다.
갑자기 기억 저 멀리에 있는 첫 퇴사 면담이 떠오른 건 ‘시간’ 탓이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 본 적 없는 촌스러운 나라서, 아무것도 안 하니 불안해서, 시간, 시간, 시간... 시간 생각을 했다. 혹시 내가 시간만 축내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자꾸 들었다. 워런 버핏이 그랬다. “잠자는 동안에도 돈이 들어오는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당신은 죽을 때까지 일해야 한다.”라고. 그런데 나는 자는 시간뿐 아니라 남들 일하는 시간에도 돈 들어오는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저 놀고 있다.
부의 추월차선으로 달려가진 못할망정 서행차선*에서조차 이탈한 나. 무(戊)의 세계로 들어온 줄 알았더니 수입 없을 무(無)의 세계로 들어온 거였구나!
“그래, 원 없이 놀아라~”
외출하는 내 뒤통수에 대고 엄마가 말씀하신다. 엄마는 나를 잘 안다. 결국 제풀에 다시 일을 시작할, 제대로 놀지 못하는 나를.
이대로 괜찮을까 싶은데. 일단 오늘은 논다. 어제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논다. 책 읽고 글 쓰고 논다. 무(戊)가 될지, 무(無)가 될지, 진짜 무[무ː]가 될지 모르겠지만.
*추월차선, 서행차선은 <부의 추월차선>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엠제이 드마코 저, <부의 추월차선>, 토트,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