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루가 지나갑니다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머무는 일주일 중, 크로아티아의 자그레브를 당일치기로 방문하는 날.
현재 머물고 있는 곳에서도 못 간 관광지가 많아서 웬 뜬금없는 자그레브인가 싶을 수도 있지만, 아무 생각 없이 구글 지도를 둘러보던 중 관심이 가는 곳이 생겨 그것 하나만 보고 바로 표를 결제해 버렸다. 이전의 글에도 언급했듯 왕복 10시간은 지금까지의 여행에 비하면 어렵게 느껴지지 않기에 부담 없이 다녀 올 예정이었다.
준비를 마친 뒤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니 오전 7시 정도. 일찍 출발하는 일정이었는데 나를 제외하고도 자그레브에 가는 다른 한국인 여행객이 꽤 있더라. 다만 버스가 오지 않은 채 생각보다 오래 지연됐는데, 이 때문에 그들이 점점 안절부절못하는 게 느껴졌다. 물론 나는 지금까지의 경험을 기반해 어련히 오겠지 싶어 그 옆에서 가만히 멍 때리고 있을 뿐이었다. 여기도 어쩔 수 없는 유럽이니깐 기다리다 보면 오겠지 뭐...
지연된다는 언급도, 사과도 없었지만 버스는 원래 출발해야 할 시간보다 40분이나 지체되어 도착했다. 뭐 유럽이니까! 어쨌든 왔으면 된 거다. 다만 그 때문에 원래의 일정인 자그레브에 오후 한시쯤 도착예정이던 버스는 두시가 다 되어서야 도착했다. 나는 여섯 시 반에 다시 부다페스트로 돌아가긴 했기에 시간이 그리 많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상관은 없었다. 내가 이곳에 온 목표는 오로지 하나였으니까.
자그레브는 아기자기하니 귀여운 동네였다. 지극히 한국인 같은 표현일 수 있지만 건물 색도 다채롭고 아기자기한 게 꼭 에버랜드 같았다. 다만 도시의 지도를 쓱 훑으며 주변을 구경했는데 눈에 띄는 관광지는 없더라. 가장 유명한 성당은 무슨 영문에서인지 크게 공사 중이었고, 그 외에도 와닿는 건 없다시피 했다.
어쨌든 그렇게 10분 정도 올라가 도착한 내 오늘의 목표는, 바로 깨진 관계에 관한 박물관.
잘 기억나진 않지만 이곳은 불과 몇 달 전 sns를 통해 세계의 이색 박물관을 소개하는 콘텐츠에서 스치듯 보았던 기억이 있다. 그때는 그저 이런 장소도 있구나 하고 순식간에 잊어버렸는데, 부다페스트에서 앓아누워 침대에서만 생활할 때 우연히 이곳이 바로 옆 나라인 크로아티아의 자그레브에 있다는 정보를 다시금 마주하게 된 것이다.
전 세계에서 관계의 상실을 가진 사람들의 사연을 담은 오브제들을 보관하는 곳인 이 박물관을 한번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조금 유난스러운가 싶기도 했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냥 이번 여행에서는 아무리 좋은 곳이라도 내 마음이 끌리면 가지 않고, 소소한 곳일지라도 내가 가고 싶으면 가는 거다. 누구한테 보여주기 위한, 내가 무언가 교훈을 얻어가야 한다는 강박은 이제 이곳에 없으니깐.
남의 깨진 관계를 제삼자의 입장으로 구경하는 데에 발생한 비용은 약 2만 원. 규모적으로는 꽤나 작은 편이긴 하지만 각자의 사연이 담긴 이야기를 위한 한국어 가이드본이 있다는 건 큰 메리트였다. 어쨌든 내 얕은 영어실력보단 조잡하긴 해도 번역기를 돌린 한국어가 더 나을 테니깐.
첫 번째로 입장한 방에 있는 오브제는 공교롭게도 튀르키예의 이스탄불, 아이슬란드의 레이캬비크,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심지어 한국의 제주등 모두 한 번쯤은 직접 방문했던 도시에서 온 이야기들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거쳐가며 마냥 행복과 즐거움만 쌓았던 그곳들에서도 누군가는 이별의 상실감을 겪고 있었겠구나. 어찌 보면 당연하면서도 슬픈 사실을 내 눈으로 직접 마주했다.
다양한 물건이 있었다. 연인과 함께 살 집을 상상하며 가구 장난감을 만들었지만, 그것이 채 완성되기도 전에 이별을 겪은 한국의 그녀, 이미 수십 년이나 지났지만 첫사랑의 물건을 간직하고 있다가 보낸 미국의 누군가. 남이 보기엔 아무것도 아니지만 이 세상에서 적어도 한 사람만큼은 마음에 계속 품고 다녔을 작은 나뭇가지. 조금은 이상해 보여도, 첫사랑이 크게 다쳤을 때 그 두려움으로 갖고 있던 상처딱지까지. 각각의 사연이 담긴 물건들은 참 다양했다. 그중 내 기억에 가장 크게 남았던 오브제는 바로 별것도 아닌 위장약 껍데기. 그의 사연은 이랬다.
꽤나 심한 위염을 앓고 있던 나. 가장 흔한 유발 요인은 동요와 인내심의 상실입니다. 그렇게 불운한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던 중 만난 첫사랑과 마주한 제 생일날, 그녀는 화려함으로 포장된 선물 대신 거대한 위장약 한 상자를 들고 나타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것에 많이 신경 쓰일 때나, 마음이 힘들 때 이걸 드세요.'
그리고 네, 저는 그것들을 사용했습니다. 제가 복용한 최대 개수는 1시간 안에 3 정이었는데, 그날은 제가 그녀와 헤어진 직후였습니다.
흔한 말로 사연 없는 사람은 없다고 하지만, 그걸 별생각 없이 입으로 꺼낼 때와 이렇게 남들의 사연을 직접 마주하는 건 참 느낌이 달랐다.
다만 이렇게 많은 사연 중에서도 내 마음을 제일 끈 건, 정식으로 배치되어 있는 오브제가 아닌 현재 이 전시를 방문한 사람들이 하나씩 남긴 그들의 방명록이었다. 해외 각국에서 온 수많은 사람들의 글귀가 적혀있었고, 그중에는 한국 분들이 와서 남기고 간 이야기도 있었다. 누가 볼지도 모르면서 타인을 위해 남겨둔 위로와 소중한 마음, 그 값진 마음을 우연히 받게 된 건 나였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이 방명록 모음을 접했을 때 약간 눈물이 핑 돌더라.
여행을 한지도 벌써 3주가 넘었다. 난 이제 나름 행복하고 기쁜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이렇게 하나씩 무언가의 계기를 겪을 때 눈물이 날 것 같은 건 아직까지 어쩔 수 없다... 그리고 누군가는 공감해 줄 내 이야기를, 나도 그곳에 적고 왔다. 내가 적은 짧은 문장은 이 자그레브 여행기의 마무리에 남겨두겠다.
이 방명록은 나중에 어떻게 될까? 사람들이 모두 채우게 된다면 박물관측이 보관을 할까, 아니면 처분을 할까. 그건 나로서 알 수 없다. 하지만 어찌 됐든 내 마음은 이곳에 적혔다. 비록 당사자에겐 전해지진 못할 마음이어도 나 역시 누군가가 나의 글을 보며 조금이라도 공감하고 슬픔을 나눌 수 있기를 소망했다. 눈물 참느라 혼났다!
평상시였다면 왕복 10시간, 버스표 8만 원을 써서 당일치기로 올만한 곳은 절대로 아니었다는 게 솔직한 감상 평이었다. 물론 이 전제는 '평상시였다면'이고, 내게는 그 가치가 충분하다고 느껴질 만큼 좋은 곳이었다. 이곳을 언젠가 또 방문할까? 다시는 그럴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내 마음을 두고 가는 만큼 다시는 이곳을 오지 않았음 한다. 이별에는 다양한 모습과 종류가 있지만 적어도 연인과의 이별은 더 이상 없길 바란다.
이후엔 시간이 조금 남아 자그레브를 한번 더 둘러보았는데, 아무리 봐도 당일치기로 온건 정말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느낄 만큼 볼거리가 없었다. 부다페스트와 자그레브 두 곳 모두 내게 있어 고요하고 평화로운 느낌의 도시는 맞지만, 왠지 모르게 이곳에서 받는 느낌은 그것들을 넘어 지루하다는 느낌도 약간 있었다.
그래도 도전해 본 크로아티아 전통 요리는 꽤나 내 취향이었다. 전식은 치킨스프였는데 약간 시큼한 맛 나는 게 호불호가 갈릴 듯싶었지만 개인적으론 맛있었고, 본식은 프랑스의 꼬르동 블루 같은 느낌이었는데 아무래도 아는 맛이다 보니 꽤 괜찮았다.
식사 후 천천히 걸어 터미널로 돌아온 뒤 다시 5시간을 걸려 부다페스트에 도착했다. 뭔가 이곳에 많은 걸 두고 가는 느낌이었는지 버스에서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더라. 기쁨 혹은 슬픔도 없었고, 걱정이나 고민거리, 현재의 여행이나 미래의 계획 등 모든 것이 머리에서 비워진 채로 그저 어둠이 내려 새까매진 도로를 하염없이 바라보았을 뿐이다.
숙소에 돌아가는 길, 그 와중에 갈증이 나더라. 편의점이라고는 당연히 없는 유럽에서 이미 밤 11시를 훌쩍 넘어버린 시간이라 포기하고 얼른 집 가서 물 마시고 쉴까 했지만 갑자기 오렌지주스가 강하게 끌려 기어코 숙소와 멀리 떨어져 있는 아직 닫지 않은 마트를 찾아내 다녀왔다.
이렇게 길게 이동하거나 오랫동안 갈증이 나면 꼭 오렌지 주스가 생각나는 버릇이 있다. 아무래도 몇 년 전 방문했던 모로코 여행의 영향인 듯한데, 당시의 라마단 기간과 사막투어까지 겹쳐 아주 힘들고 지치던 차에 시내로 돌아와서 마셨던 고당도의 생과일 오렌지 주스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냥 문득 그때 생각이 스쳤을 뿐이다.
그 오렌지주스를 고집하느라 결국 숙소에 도착한 건 자정이 넘은 시각이었지만, 자기 전 처리해야 하는 업무가 남았기에 피곤한 몸 이끌고 일 마무리 하느라 한 시간은 더 노트북과 씨름한 뒤 겨우 씻고 누울 수 있었다.
긴 하루였다. 그리고 고요하지만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그저 또 이렇게 내 '이별이 가져다준 세계여행'의 하루가 흐른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