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렵과 채집의 시대를 오래도록 거쳐, 우리는 경작의 시대로 넘어오게 되었다. 이제는 생산의 시대가 아닐지 생각한다. 수렵과 채집의 시대의 먹고 산다는 것은 곧 생존을 획득하거나 그렇지 못하는 것. 그 자체였지. 살아있음, 살아남음을 뜻하는 생존은 말 그대로 살아서 남아있는 거야. 그 날의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하면 세상에 남아있을 확률이 줄어드는 그런 긴장된 나날들의 연속인거지.
무조건적 소비가 전제된 수렵과 채집에서 저축성 소비가 전제된 경작으로의 변화는 살아남음을 살게 함으로 바꾸는 혁명이었다고 생각한다. 당장 오늘을 대비해야 하는 생활과 내년을 대비하는 생활의 격차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지. 그렇기 때문에, 성장하고 발전한 결과 우리는 더 먼 미래를 대비할 수 있게 된 거란다. 아직도 내일을 예측하지 못하는 우리가 미래를 대비한다는 사실이 우습기도 하지만 말이야.
그래서 잉여생산물을 기반으로 한 오늘날도 딱히 크게 바뀐 것이 없다는 면에서, 나는 먹고 산다는 것이 소름 끼치게 무서울 때가 많다. 아침이 되면 일터를 향해 꼬리에 꼬리를 문 자동차의 행렬을 바라볼 때 느끼는 것이 있단다. 나는 그 자동차 한 대 한 대 마다 살아남기 위해 고단함과 싸우며 무거운 마음으로 일터로 향하는 사람들이, 가공한 석기를 들쳐 매고 정처 없이 헤맬 준비를 하는 원시인들과 많이도 닮아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원시시대야 배만 부르면 일단락된 하루였겠지만 우리는 그런 생존의 삶이 아니라 누리는 삶을 위해서 사는 것에 가깝지. 그러므로 우리가 기울여야 하는 먹고사는 것이란, 배부름은 애시당초 해결이 되어야 하는 그 기본에서 더 나아가야 한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기울여야 하는 노력의 정도는 더 형이상학적이며, 또 그래서 그 노력의 척도나 정도를 가늠하기도 만족하기 더더욱 어려운 상황은 아닌가 생각한다.
더 나아가 먹고사는 것이 더 무서워지는 때는 먹는 것이 아니라 먹이는 것이 전제되었을 때란다. 이는 누군가를 미래에 먹여야 한다는 것을 포함하는 의미야. 그렇지 앞서 내가 말한 것을 응용한다면, 누군가를 먹이는 것에서 더 나아가 누군가의 삶이 누려져야 하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지. 풀어 말하면 생존이 생활로 변하고, 혼자의 생활이 누군가와 함께하는 생활로 변하는 것은 나 자신의 유형적 혹은 무형적 노력이 반드시 성장해야 한다는 것이란다.
척도나 정도를 가늠키 어려운 노력이 반드시 성장해야만 한다는 것은 원시의 수렵 혹은 채집만큼이나 가혹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어려운 길을 걷는 이유는 바로 책임이란다. 사랑에도 한계는 존재하기 때문에 책임이라 불리는 막중한 단어가 생겨난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책임이라는 것은 고귀한 것이야. 그 고귀한 마음을 품고서, 자라나는지 아닌지 모르는 노력을 가꾸고 키우는 불굴의 투지와 끈기가 나에게는 너무도 무거워 보이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