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끝, 시간의 들판에 서서​

그래, 여기까지 잘 왔다.

by 담우

바람이 달라졌다.

어제까지는 살랑이던 바람이 오늘은 묵직하게 뺨을 스친다. 코끝이 시려오고,

담벼락에 기대선 그림자조차 길게 늘어진다.

길가의 가로수들은 이미 절반쯤 헐벗은 몸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낙엽은 바람의 손에 이리저리 떠밀리며 흩어진다.

그 잎새 하나가 내 앞을 스쳐 지나갈 때, 문득 내 마음 한쪽이 덜컥 소리를 낸다.

“아, 나는 이제 가을의 끝자락에 서 있구나.”

살아온 세월이 문득 손끝에 닿는다.

돌아보니, 시간은 너무 빨랐다.

언제나 ‘내일’을 향해 달리기만 했다.

더 나은 내일, 조금 더 단단한 내일,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고 싶었던 내일.

그렇게 달려오다 보니 어느새, 내 안의 봄은 저만치 떠나가고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출근길 지하철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이 낯설었다.

한때는 청춘이었고, 열정이었고, 꿈이었는데 — 이제는 묵직한 침묵이 되어 있었다.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내가 잠시 숨을 고를 때마다, 그것은 어느새 한 계절을 데려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지금, 나는 가을의 문턱을 넘으며 내 삶의 ‘뒤쪽’을 바라보게 되었다.


길을 걷다가, 무심히 발끝에 밟히는 낙엽을 주워본다.

마른 결이 손끝에 바스락거린다.

한때 저 잎도 푸르렀고, 빛났고, 바람과 햇살을 함께 누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땅 위에서 사그라들며 마지막 향기를 내뿜는다.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내 인생과 닮아 있었다.

젊은 날엔 몰랐다.

모든 것이 영원할 줄 알았다.

사람도, 열정도, 기회도, 그리고 사랑도.

그러나 세월은 가르쳐 주었다.

모든 것은 유한하다는 것을.

유한하기에 아름답고, 유한하기에 소중하다는 것을.

나는 그제야 비로소 ‘시간’이라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달력의 숫자가 아니라, 마음의 주름이다.

나를 지나간 계절들이 마음속에 쌓여, 그 무게로 내가 깊어지는 것이다.

젊을 때는 세상이 넓다고만 느꼈는데, 지금은 시간이 좁다고 느껴진다.

하고 싶은 일은 여전한데, 할 수 있는 시간은 줄어든다.

이 모순이 삶의 슬픔이자 아름다움이다.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과연 옳았을까.’

수많은 선택의 갈림길에서 나는 늘 ‘해야 할 일’을 선택해 왔다.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해야 하는 일’을.

그것이 어른의 몫이라고 믿었고, 책임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문득 뒤돌아보니,

그 ‘해야 함’이 내 안의 꿈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그렇다고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 길 위에서 나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수많은 이야기를 쌓았다.

기쁨도, 슬픔도, 실패도, 그리고 다시 일어섬도.

그 모든 것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그렇기에 내 삶은 완전하지 않아도 괜찮다.

부족했지만 진심이었고, 서툴렀지만 성실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낙엽이 바람결에 몸을 맡긴다.

그 떨어지는 모양새가 마치 한 생의 퇴장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다.

땅으로 돌아가 다시 흙이 되고, 내년의 새싹을 키워내는 순환의 일부다.

그것이 자연의 법칙이듯, 인생 또한 그러하다.

한 시대가 저물면 또 다른 시대가 열린다.

내 청춘이 떠났다면, 이제는 내 ‘삶의 깊이’가 찾아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가을의 끝에서 마음을 가만히 다독인다.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남아 있고,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비록 예전처럼 빠르게 달릴 수는 없지만, 대신 천천히, 더 깊게 걸을 수 있다.

속도 대신 방향을, 경쟁 대신 의미를, 성공 대신 평온을 선택할 수 있다.

그것이 세월이 내게 준 마지막 선물인지도 모른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저 멀리 구름 사이로 스미는 빛 한 줄기.

그 빛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이상하게 마음을 울린다.

그 빛 속에서 나는 내 젊은 날을 본다.

그리고 지금의 나를 본다.

서로 다른 시간 속의 내가, 잠시나마 한자리에 선다.

“그래, 여기까지 잘 왔다.”

나는 나 자신에게 그렇게 말해준다.

누구의 평가도, 비교도 필요 없는 말.

오직 나 자신에게 보내는 한 줄의 위로.

지금 나는 인생의 가을을 걷고 있다.

아름다움과 쓸쓸함이 공존하는 계절, 그리고 다음 계절을 준비하는 시간.

이 계절이 주는 쓸쓸함은 슬픔이 아니라, ‘멈춤’의 언어다.

서두르지 않아도 좋다는, 잠시 숨을 고르라는, 인생의 쉼표다.

나는 그 쉼표 위에 앉아, 내 삶의 문장을 다시 읽는다.

처음부터 완벽하지 않았고, 때로는 잘못된 문장도 있었지만

그 안에는 나의 진심이 있었고, 누군가를 사랑한 흔적이 있었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나는 그 문장을 고쳐 쓰지 않겠다.

삶은 오탈자조차도 의미가 있는 원고이니까.


바람이 다시 불어온다.

이번엔 조금 더 차갑다.

낙엽이 흩날리며 나무의 마지막 잎새가 떨어진다.

나는 그 앞에서 한동안 서 있었다.

그리고 조용히 웃었다.

나도 이제 조금은 비워낼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안다.

비워야 채울 수 있고, 내려놔야 다시 걸을 수 있다.

내 인생의 겨울이 찾아오더라도, 나는 두렵지 않다.

그 겨울의 눈 속에도 봄의 씨앗이 숨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러나 마음은 기다릴 줄 안다.

그리고 나는 오늘, 마음의 온도를 다시 지핀다.

내가 걸어온 발자국이 어설펐을지라도, 그 길 위엔 나의 계절이 있었다.

그것이면 족하다.

가을의 끝자락, 나는 조용히 나 자신에게 인사를 건넨다.

“수고했다. 이제, 조금은 쉬어가자.”

그리고 그렇게,

내 마음의 들판 위에 한 장의 낙엽이 천천히 내려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