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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안 Aug 12. 2023

핑크나라 바비공주 ;)

바비


*스포일러 주의! 영화 관람 후에 읽으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우리 집 바비는 '전형적인 바비'였다. 금발에 파란 눈, 늘씬한 S라인 몸매, 밝고 건강한 피부색. 아니, 전형적인 바비 출신의 '이상한 바비'라고 부르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에게 물려받은 것이라 머리는 헝클어지고, 벌거벗은 데다가 다리에는 지워지지 않는 형광펜 자국이 나 있었으니까. 도의적으로 머리를 빗겨주고 엉성한 원피스를 지어 입히기는 했지만, 내 취향을 따지자면 이국적인 패션모델 스타일의 바비보다는 순정만화 속 공주님 같은 쥬쥬였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이 일화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은, 국산이 최고라는 건 아니고, 우리 세대 소녀들의 놀이 생활에서 바비가 상당히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강경 쥬쥬파였던 나조차도 '바비'라는 이름이 가지는 압도적인 존재감은 무시할 수 없었으니. 예쁜 인형, 또는 완벽한 여성의 대명사, 바비. 감히 그 명성을 들어보지 못한 소녀가 어디 있으랴.

내레이션이 '완벽한 미소' 운운할 때 격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던 장면 (출처 : IMDb)


프리티하고 인텔리전트한


   배우이기도 하지만, 국내에서는 <레이디 버드>와 <작은 아씨들>의 감독으로 더 유명한 그레타 거윅이 틈틈이 전해지는 제작 소식만으로도 화제를 모았던 핑크빛 신작, <바비>로 돌아왔다. 현실판 바비 인형이자 주체적 여성 캐릭터의 창조에 지속적 관심을 보이는 배우 겸 제작자 마고 로비, 그리고 꾸준히 여성 중심의 서사를 만들어온 그레타 거윅의 만남이 다른 무엇도 아닌 바비에 관한 영화라니. 그야말로 전 세계 소녀들을 겨냥한 궁극의 필살기가 아닌가.

첫 티저가 공개됐을 때 모두가 조롱했던 켄.. 그러나 모든 것은 의도된 우스꽝이었음을 (출처 : 네이버 영화)

    거기에 캐스팅은 또 얼마나 화려하고?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에서 활약한 포스트 성룡 시무 리우,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 속 신스틸러 반항아 에마 매키, 코믹 연기계의 신성으로 떠오른 케이트 맥키넌, MZ세대에서 가장 핫한 가수 두아 리파까지. 아, 물론 탈색한 머리에 태닝 스프레이 같은 쉐딩으로 우스꽝스러운 역할도 훌륭히 소화해 낼 수 있음을 보여준 라이언 고슬링을 빼놓을 수 없지. 고슬밥이 이렇게 웃길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니 모든 캐스트의 춤 실력이 너무나 출중해서 자칫 어색해 보일 수 있는 세미 뮤지컬 장면들을 비주얼 맛집으로 만들어버린 건 덤.

    춤추고 노래하는 장면이 아니더라도, 영화는 시각적으로 매우 풍요롭고 참신했다. 사운드 트랙들도 어찌나 중독성이 강한지 몇 주가 지난 지금도 매일같이 흥얼거리고 있을 정도. 그야말로 시작부터 끝까지 눈과 귀가 신나는 영화다.

(출처 : 네이버 영화 / Twitter @PopCrave)

    분홍색을 떡칠한 세트와 의상, 현란한 댄스 시퀀스에 더해 그레타 거윅의 재기 발랄한 연출은 흥을 한층 더 돋운다. 만화적 문법-효과음, 충돌을 시각화하는 타이포와 그래픽 등-을 그대로 차용한 부분이나, 바비랜드와 현실을 오갈 때의 동화적 이미지가 특히 좋았다. 자칫 유치해 보일 수 있는 장면들이 영화의 전체적인 톤과 어우러져 굉장히 스타일리시하게 보였고. 사소한 부분까지도 완벽하게 조율하는 철저한 미학에 따라 영화를 구성했다는 증거다.


우리 언니 찬양 좀 할게요


    이 영화에서 무엇보다도 주목할 만하고, 누구보다도 반짝반짝 빛나는 건 역시 '전형적인 바비' 역의 마고 로비다. 미치게 예쁘고 노래도 잘하고 춤까지 기깔나게 추는 이 여자. 그 정도 완벽한 거로는 모자랐는지, 본업 천재이기 까지 하다. <바빌론>을 보고 입이 떡 벌어진 게 엊그제 같은데, 완전히 새로운 역할을 또 돌아버리게 찰떡으로 소화해버리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매번 이토록 새로울까? 어떻게 매번 이토록 반할 수밖에 없을까?

이 언니 퍼컬 최소 바비 (출처 : 네이버 영화)

    <바비>를 보자마자 불타오르는 덕심에 디즈니+에서 서비스 중인 <암스테르담>까지 연달아 봤다. 오타쿠는 참지 않아 크리스찬 베일, 존 데이비드 워싱턴, 마고 로비 주연에 조연으로는 라미 말렉, 안야 테일러 조이, 조 샐다나, 마이클 섀넌, 테일러 스위프트, 심지어 로버트 드 니로까지(!) 그야말로 초호화 캐스팅을 자랑하는 이 영화. 굵직한 배우들이 모인 만큼 연기도 좋았고, 1930년대를 아름답게 구현해 낸 비주얼도 좋았지만... 영화 자체는 별로였다. 왜 극장 개봉이 취소되었는지 알 것 같았달까.

    상징적인 척하고 싶었으나 내포된 의미가 빈약한 대사들, 그 때문에 모호해지는 전체 서사와 주제, 예술적 개성을 노린 듯하나 두루뭉술한 이야기와 맞물려 의아함만 자아낼 뿐인 파편적 편집. 그런데 그 와중에도 마고 로비는 어찌나 빛이 나던지. 초반이 너무 지루해서, '마고 나올 때까지만 보자' 생각했던 게 마고가 나오니까 그대로 엔딩까지 보고 말았다는 이야기.

근데 한 번쯤은... 볼 만해요 (출처 : Louder Than War)


남자는 핑크지

 

    해외에서는 남녀를 불문하고 온통 핑크로 치장한 채 <바비> 관람 인증을 하는 릴스가 유행이더라. 안타깝게도 우리나라는 관객의 90% 이상이 여성인 것 같고, 소수의 남성들마저 대부분 여자친구에게 억지로 끌려온 분들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이 영화, 쑥스러움만 조금 무릅쓴다면 남성분들도 충분히 볼 만하다.


바비는 무엇이든 될 수 있어, 켄은 그냥 켄


    포스터에 적힌 이 문구 때문에 여성우월주의적 페미니즘 영화라고 오해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사실 영화는 바비랜드현실, 두 개의 불평등한 사회를 통해 양면적인 관점에서 여성과 남성 양쪽에게 부과된 고정관념에 대해 돌아보도록 만든다. 여자든 남자든,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굳이 무엇이 되려 노력하지 않아도, '그냥' 우리 자신이어도 괜찮다.

(출처 : EL PAIS)

    마지막 장면에서 인간이 된 '바비(by 마고 로비)'는 하이힐이 아닌 버켄스탁 슬리퍼를 신고 가족들의 응원을 받으며 비장하게 커다란 빌딩 안으로 들어선다. 그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건 대기업 면접도 에이전시와의 미팅도 아닌, 산부인과 선생님과의 상담. 이 허를 찌르는 엔딩은 바비가 완벽한 인형에서 평범한 인간이 되었음을 효과적으로 알려줌과 동시에(바비랜드의 인형들은 생식기가 없다는 언급이 나온다), 굉장한 무언가가 되지 않아도, 그냥 한 여자, 한 사람인 너로서도 충분하다고 말하는 듯했다.

    그러니 무엇이 되고 싶은 건지 고민하는 소녀들이여, 무엇이 되어야만 할지 고뇌했던 소년들이여, 지금 당장 머리부터 발끝까지 핑크로 차려입고 극장으로 달려가시길!


단 한 마디 올해 최고의 유행어는 "하이, 바비!"


* ESFP 마고 로비의 다사다난 1920년대 할리우드 입성기가 궁금하다면 : 지옥에서 올라온 시네마 천국

* 다안의 영화 이야기가 더 듣고 싶다면 : 다안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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