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 뜨거운 물 목욕
11월 중순에 중요한 (근데 처음 해보는) 프로젝트가 무려 2주간 잡혀있어서 세이브 원고를 만드는 중이다. 일을 처리하는 속도도 느리고, 고지식해서 빙빙 돌아가는 일이 잦은 나에게 일주일에 1편 꾸준하게 글을 올리는 것도 쉽지가 않구나. 그래도 어디선가 내 글을 읽을지 모를 독자를 상상하며 연재 약속을 지켜내려고 고군분투한다. 아자아자!
내가 사는 지역은 지난주까지 여름 날씨라 할 만큼 날이 무더웠다. 하지만, 할로윈을 막 지난 오늘 공기는 가을의 서늘함을 좀 더 짙게 머금은 듯하다. 날씨가 추워지니까 내가 좋아하는 따땃함에 마음이 더 기울어진다. 길가에서 팔던 따끈한 꿀호떡과 팥 붕어빵,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오뎅 국물(어묵탕이라 써야 하는데 80년대 태어난 나는 길거리 음식의 찐 면모는 왠지 오뎅 국물이라고 써줘야 나는 것 같다 ㅜㅠ), 귀엽고 빨간 머그컵에 담긴 달달구리 핫초코까지. 캬- 따끈따끈한 먹을 걸로만 떠오르지만 단서련의 단서 중에 중요한 부분은 사실 먹을 게 아니다. 따끈..... 을 조금 넘어선 뜨끈한 목욕이다.
글에서 몇 번 언급되었지만 나는 좀 마른 편이다. 뼈에 붙어있는 지방층이 얇아서인지 추위에 약한 편이다. 어릴 때부터 수족냉증을 달고 지냈고 (근데 손발이 미친 듯이 차가워도 그때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지내며 영하의 날씨에도 학교에서 하라는 대로 얇은 치마 스타킹만 신고 살았다. 허허허. 지금은 못함;) 친구들이랑 수영장에서 놀면 입술과 손톱이 보랏빛으로 변했고 1년 365일 즉, 뜨거운 여름날에도 차가운 물로 목욕은 절대로 못한다. 차가운 물로 목욕하면 신진대사를 촉진시켜 건강이 좋아진다는데..... 나는 정말 못하겠다. 마침 어제는 친정 엄마가 한국에서 소포를 보내준다고 해서 뜨끈뜨끈 발열 양말(USB 충전식 발열이라니 역시 양말은 한국이 최고다!)을 잔뜩 주문해 두었다. 이 양말들과 함께 이번 겨울을 잘 버텼으면 좋겠다.
아래글은 2017년 12월 23일에 페이스북에 올렸던 일기를 퍼온 것이다.
흔히들 중독이라고 하면 몸에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유혹이 너무나 강렬해서 개인의 의지로 쉽게 끊을 수 없는 무언가와 결합된다. 마약 중독, 섹스 중독, 게임 중독, 카페인 중독, 밀가루 중독에서 운동 중독 (아마도 운동의 경우에는 몸에 좋지 않을 정도로 과하게 하는 경우겠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수만큼이나 이 세상에는 다양한 중독들이 있다. 나는 특별히 중독이라 부를 만큼 절제하지 못하고 과하게 욕심내는 것이 없는 편인데 굳이 한 가지를 꼽자면 바로 목욕 중독이라고 소심하게 밝혀본다. 물론 목욕 중독이라고 해서 내가 매일 목욕을 하며 깔끔을 떠는 건 절대! 아니다.
12월 초까지도 따뜻한 캘리포니아였건만, 이제는 더 이상 만만한 가을이 아님을 확인시켜 주는 매서운 겨울바람이 느껴지는 이번주였다. (껄껄껄. 확실히 겨울바람이 시작되긴 했지만 확인해 보니 여전히 최고 기온이 상온 10도를 웃도는 날씨네요. 죄송합니다.) 울 아이는 남자아이인지라 밖에서 뛰어노는 게 좋겠다는 나 나름의 강박관념이 있어서, 이번주 수요일에 프리스쿨을 마치고 또래 남자아이를 한 명 더 불러서 아이들을 놀이터에 신나게 뛰어놀게 해 주었다. 아이들은 플레이 데이트를 하고, 그 집 엄마와 나, 약간 마른 체구의 두 동양 여인들은 12월 중순이 지나가는데도 안일하게 가을 옷을 입은 덕분에 몸에 잔뜩 힘을 준 채로 담소를 나누게 되었다. 한국의 겨울이 무지막지하게 춥긴 해도 뜨끈뜨끈한 온돌 바닥이 그립다, 맨발로 그 따끈한 방바닥을 밟고 싶다, 지금 당장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따끈한 오뎅 국물 한 컵 마시고 싶다, 소소하고 그리운 이야기에서, 우리의 이야기는 목욕 이야기로 넘어오게 되었다. 이때 나는 한 번도 쓰지 않는 표현을 처음 듣게 되었는데, 온유 친구의 엄마가 쓴 이 것이 바로 내가 중독된 목욕에 딱 들어맞는 표현이다.
녹진녹진해지는 목욕.
다시 말하자면 나는 뜨거운 물에 하는 목욕이 좋다. 미지근하고 따뜻한 물이 아니라 뜨끈뜨끈해서 피부가 살짝 발갛게 달아오를 정도의 목욕이 좋다. 그리고 우리 집 화장실이 좀 작긴 하지만, 내가 목욕을 하면 뜨거운 물에서 올라온 수증기가 그 안을 가득 채워서 내가 숨 쉬는 공기까지 따뜻해지는 목욕이 좋다. 지금 살고 있는 우리 집이 실내온도가 유독 낮은 편이라 나의 중독 현상이 좀 더 심해지기도 했다. 안 그래도 겨울이면 심각한 수족냉증이 집에 있으면 (.... 밖이 아니랍니다. ㅠㅠ ㅋㅋㅋ)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해진다. 그럴 때마다 나에게 내리는 처방전은 뜨거운 목욕. 뜨거운 물이 정수리에 쏟아져서 머리카락을 따라 부드럽게 목덜미를 타고 내려와 (나의 몸에 별 곡선은 없지만....-,.- ㅋㅋㅋ) 몸의 굴곡을 따라 온몸을 마사지하듯이 훑어내려 오면 근육 사이사이에 박혀있던 차가운 긴장감이 모두 빠져나와 녹아내리는 것 같다. 혈관의 넓어져서 평소의 나와 다르게 피가 엄청난 속도로 콸콸콸 돌고 있다는 게 몸 구석구석에서 생생하게 느껴진다. 특히 수족냉증으로 고생한 손끝 발끝에 엄청난 양의 피가 전달되어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는 혈관들이 찌릿찌릿하게 느껴진다.
혈관이 확장되는 것 때문에 뜨거운 물로 장시간 목욕하는 게 피부에 그렇게 안 좋다고 한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녹진녹진한 그 유혹을 떨쳐낼 수가 없다. 내가 목욕할 때는 타이머로 작동하는 전열등을 켜놓는데, 내가 쓰는 화장실 쪽 타이머가 유독 빨리 움직여서 전열등이 금방 꺼지곤 한다. 집주인한테 말해서 타이머를 고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면 나의 목욕이 더 길어질 것만 같아 진심으로 꾹 참고 있는 중이다. 완벽한 금뜨목까진 못 하지만 그래도 중독의 강도가 더 깊어지지 않도록 나름 노력하며 양보하고 있다.
2014년에 나고야에 갔을 때 케이코와 마사노리의 신혼집에서 하루 머물렀었다. 그때 케이코가 목욕물을 받아주어 목욕도 했었는데, 너무나 일본스러운 작은 소형 사이즈 욕조였다. 뜨거운 물의 온도를 유지시켜 주는 보일러 기능이 탑재된 그 욕조가 너무나도 갖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