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더 설거지를 빠르고 깨끗하게 하는지, 누가 더 청소를 효율적으로 깔끔하게 하는지, 누가 더 가족들이 먹을 음식을 맛깔스럽고 영양가있게 만드는지, 누가 더 빨래에 좋은 향을 남기고 보송보송하게 말려 예쁘게 개어놓는지,
내가 참여하는 리그는 이런 것이 아니다.
이런 프로들의 세계는 손이 느린 나는 자격미달로 참가할 수 없다.
나는 살림 대회 아마추어 리그,
기본 중의 기본 "누가 더 부지런한가?"를 두고 고군분투한다.
제일 처음 상대했던 건 시간이었다. 대회 초창기에 나는 내가 아닌 타인을 위해 삼시세끼를 메뉴 생각하는 것이 참 버거웠다. 당신도 이미 알다시피 시간이란 녀석은 참 부지런하다. 쉬지 않고 흘러간다. 30대로 넘어오지 못한 나는 그런 녀석을 상대하기에 능력치가 턱없이 부족했다. 체력도, 머리도, 경험도......거기에 뭉그적뭉그적 기술까지 걸리면, 정말 눈 깜짝할 새 다음 식사 시간이 코 앞으로 들이닥치고, 싱크대에 설거지 탑이 올라가있고, 빨래통에 엄청난 양의 빨래더미가 쌓여있곤 했다. 신혼 때의 나는 매번 대회 준비가 허술했고 아주 자주 시간에게 패배하곤 했다. 그리고 부지런한 시간에 대한 패배감은 살림을 도맡아해야하는 억울함으로 몰려왔다. 잘 하지도 못하는데 해내야만 하는 그 상황이 참 싫었던 것 같다.
결혼 8년차, 여전히 나는 시간보다 부지런하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8년 전의 나보다는 아주 쬐끔 부지런해진 것 같다. 무엇보다도 시간이 던지는 심리전에 조금 담담해졌다고 해야하려나? 이 부분은 특히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큰 도움이 된 듯하다. 할 일은 2배,3배로 많아졌는데 대결에 임하는 마음가짐이 제법 단단해졌다. 이제는 밥통에 밥을 앉히고, 그릇을 쓰고 닦고 정리하고 다시 꺼내고 무한 반복이 되어도 그다지 억울하지 않다. 바로바로 엉덩이 떼기 방어 기술로 뭉그적뭉그적 기술을 날려버리기까지.......! (뿌듯) 그리고 자주 써먹을 수 있는 메뉴들로 돌려막기 기술도 습득하게 되서 지금은 1.2.3차전, 즉 아침, 점심, 저녁까지 뭘 먹을지를 대충 머릿 속에 미리 그려넣기 때문에 좀 더 사람다운 모습으로 살림을 하게 되었다.
살림 대회의 또 다른 상대 선수는 바로 음식들이다. 이 녀석들은 자연의 섭리에 따라 부지런하게 상해간다. 모양새를 일그러뜨리고 물컹물컹해지고 냄새가 나고 곰팡이를 피워내며 변해간다. 살림꾼이 제때 제때 냉장고에 뭐가 남아있는지 기억해두고 계획을 짜서 알뜰하게 써먹지 않으면 못 먹고 버리는 음식이 많아진다. 보관 방법을 제대로 신경써주지 못해 예상보다 금방 섞어버리는 안타까운 음식들. 장보다 호기심에 사놨다가도 식구들의 호응을 얻지 못해 손이 덜 가면서 쓰레기통으로 버려지는 음식들. 한번 만들어놨다가 나중에 또 먹으려고 용기에 보관해놨는데, 그대로 냉장고 뒷방 신세가 되어버린 음식들. 국물까지 쓰겠다며 남겨두었는데 이제는 뚜껑 열면 쉰내 때문에 이웃들한테 눈총받을지 모르는 애물단지 신김치까지!! 신선함을 잃어가는 데 부지런한 음식들아- 나도 사실은 너희랑 같은 신세란다.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게으른 주부라고 너무 냉랭하게 굴지말아다오!
다음에 소개할 상대 선수는 쓰레기/재활용 2인조다. 이 녀석들 또한 엄청난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쓰레기는 초파리 소환 능력이 있다. 불과 얼마 전 일인데, 바나나가 뭉그러져서 껍질이 살짝 열려있었다. 쓰레기통으로 버리려고 살짝 건드렸더니 초파리 떼가 무슨 판타지 영화의 한 장면마냥 날아올랐다. 한동안 허공에 박수치면서 이 녀석들 소탕하는 데 어찌나 시간이 오래 걸렸는지.......그것은 나의 명백한 패배였다. 재활용은 코로나 시대에 떠오르는 신흥강자다. 자가격리가 몇 달째 지속되면서 생필품에서 식료품까지 많은 부분을 배달에 의존하며 지내고 있는데 어마어마한 속도로 쌓여가는 포장재 + 그리고 내용물을 닦거나 상자를 분해해야하는 등 한번 더 손이 가는 번거로움을 선사한다. 맘 같아서는 그냥 항복해버리고 싶다. 근데 안타깝게도 아내에다가 엄마라는 타이틀이 더해지면, 항복이 허락되지 않는다. 패배해도 그저 묵묵히 다음 경기를출전해야한다. 이러다보니 결혼 하기 전에는 음식물 쓰레기 쳐다보면 역겨워서 손도 못 댔는데, 이제는 하수도 수채구멍을 무심하게 슥슥 닦는 정도가 되었으니 많이 발전했다. 택배도 받자마자 상자분해에 착수한다. 슉슉슉! 착착착! 로보트가 따로 없다.
야물딱지게 살림을 잘 하려면 아직 갈 길이 너무 멀다. 그저 쓰레기와 재활용을 제때 처리하는 것 뿐만 아니라,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지구를 위하여 엔트로피까지 생각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나는 아마추어에서 프로 리그로 올라갈 수 있으리라!
마지막, 사실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살림 아마추어 선수권 대회의 최강자를 만난듯한 느낌이 들어서이다. 그건 바로 물!!! 물은 집에서 아주 다양한 곳에 쓰인다. 우리의 몸을, 밥 먹는 그릇을, 옷을 깨끗하게 씻어주는 유용한 물. 이렇게 선한 물이 살림꾼들의 뒤통수를 제대로 후려친다는 것. 이미 앞서 말한 상대 선수들 때문에 손이 느린 나의 일과는 포화상태다. 아이들 돌보면서 재택근무하는 신랑까지 포함하여 삼시세끼 음식을 준비하고 요리하고 설거지 하고 빨래, 청소, 쓰레기 처리 하는 것만으로도 내 체력은 버겁다고 신호를 보낸다. 이 와중에 집안 곳곳에 사용되는 물이 바로 때로 변신하여 숨어있다. 욕조에, 세면대에, 칫솔꽂이에, 애들 쓰는 빨대컵에, 물통에, 그리고 제일 귀찮은 것은 밀폐용기 뚜껑에 둘러쳐진 고무패킹 안쪽.......아- 정말 곳곳에 스며있는 붉으스름한 물때를 보면 소름이 돋는다. 살림을 워낙 못 해서 8년이 지난 이제서야 손에 잡는 게 조금 익숙해진 식칼을 들고 고무패킹을 분리하면서 생각했다. 안 그래도 글 쓸 시간 없는데, 이런 거까지 신경쓰면서 살아야하는거니?! 판도라의 상자 속에 꽁꽁 감춰놨던 억울한 마음이 다시 터져버릴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