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거리면서도

나는 바로 서기 위해 노력한다

by 단청

상담을 마치고 이틀 뒤인 화요일, 상담사실 확인서가 나왔다는 말에 나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택시를 타고 센터로 갔다. 방금 전에 직원분들이 점심식사를 마치셨는지 짭조름한 반찬 냄새가 사무실에 감돌았고, 그분들은 자리를 치우고 나를 응대했다. 나는 신분증을 제시한 뒤 서류를 받아 들고 다시 택시를 잡아 회사로 돌아왔다. 봉투를 열어 내용을 확인하자 거기에는 주된 가해자인 아빠의 이름 석자가 확실하게 적혀있었다. 누구도 인정하지 않은 사실이 흰 종이에 검은 잉크로 틀림없이 새겨져 있었다. 이것을 얻기까지 참 멀리 돌아왔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묵묵히 빵을 먹었다. 감상에 젖고 싶었지만 점심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시간에 쫓겨 꾹꾹 욱여넣는 삶은 퍽퍽하고 목이 메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이사를 마쳤다. 청소와 짐정리를 도와준 엄마가 가고, 다른 걸 제쳐두고 먼저 조립한 데스크톱으로 각종 신고를 접수하고 침대에 누웠다. 난생처음으로 오롯이 나만의 공간인 곳에서 처음 청하는 잠이었다. 나는 꿈도 꾸지 않고 깊은 잠에 들었다. 깨고 일어나서도 새로운 공간에 대한 낯섦 따위는 없었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가족과 분리되길 원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여건이 있음에도 무력함에 젖어 도망치지 못했던 지난날을 후회하기도 했지만, 이제라도 벗어나서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나를 다독였다. 내게는 아직 해결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기에 주저앉을 생각은 없었다. 낡은 도어락과 잠금장치를 새것으로 달고, 보안업체와 계약을 맺어 방범장치를 다는 것도 중요했지만, 센터에서 받은 서류로 가해자인 아빠에게 등초본 교부제한을 거는 게 우선이었다. 전입신고를 했으니 서류를 떼서 찾아오면 겨우 얻은 한 줌짜리 평화마저 산산이 흩어질 거란 생각에 나는 연차를 내고 행정복지센터 업무 시작시간에 맞추어 그곳을 방문하여 신청을 넣었다.


사실 가족 모두에게 교부제한을 신청하고 싶었으나 명시된 가해자는 아빠 한 사람이었으므로 나는 그에 대한 제한만 걸 수 있었고, 이를 받아들였다. 일단 형제자매인 언니와 남동생은 내 앞으로 주소가 표기된 서류를 뗄 수 없었으니 괜찮았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엄마에게도 제한을 걸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어 위험요소 하나는 남아있는 셈이었으나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선 일에 대해서는 미련을 버렸다. 일단 무엇이라도 하나씩 해결해 나가는 게 중요했다.


그리고 나는 개명을 신청했다. 친가와 절연하면서부터 막연하게 생각하던 일이었다. 나는 굳이 엄마에게 알리지 않고 개명신청을 했고, 약 두 달 조금 안 되는 시간이 걸려 개명허가를 받아 이름을 바꿨다. 신청서에 한자를 잘못 쓴 걸 인지하지 못하고 신고를 해서 본래 원하는 뜻을 가지지는 못했지만, 이 구차한 삶을 꾸역꾸역 이어나가려는 나의 숨겨진 의지가 발현된 것으로 치기로 했다. 어쨌거나 내 의지로, 내 뜻대로 원하는 바를 이루었다는 게 중요했다. 물론 개명 이후에 거친 각종 명의변경 절차는 썩 유쾌하지 않고 지루했지만 미리 알고 있던 일들이었기에 견디지 못할 건 없었다. 그렇게 나는 낡고 상처 가득한 이름을 버렸다. 새로 태어나는 기분까지는 아니었지만 너덜거리는 허물을 벗어던진 기분이었다. 이제는 정말로 내가 선택하는 삶을 살아가는 거구나, 하는 새로운 중압감이 어깨 위에 무겁게 걸렸지만 나는 받아들일 수 있었다. 받아들여야만 하는 일에서 도망치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이 결심을 배반하고 도망치고 숨고 싶은 순간이 수없이 오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삶이란 원래 그런 것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이러한 일들을 거친 지금의 나는 여전히 연약하고 불안하다. 하루에도 수 없이 과거를 돌아보며 후회하고, 분노하고, 체념하는 삶은 바뀌지 않았다. 약을 복용하지 않으면 공황증세가 오고, 집중을 할 수 없는 것도 여전하다. 죽겠다고 쌓아놓은 빚은 이자부터 갚아나가는 중이고 느슨한 경제관념은 겨우겨우 조이기 시작했다. 알의 껍질을 갓 깬 어린 새처럼, 솜털도 없이 냉정한 현실의 바람을 맞으며 떨고 있다. 그러나 나는 무력하게 싸늘히 식어가지 않을 것이다. 내게는 속사정을 털어놓을 수 있는 귀한 인연들이 있고,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관계지만 아직은 비빌 수 있는 엄마라는 애증의 언덕이 있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고귀하고 순결하지 않아도 삶은 삶이다. 진창을 구르고 만신창이가 되더라도 살아있는 게 삶이다. 그걸 지켜나가기로 한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발버둥 치며 버틸 것이다. 남들이 내 작태가 추하다 욕해도 상관없었다. 원래 연꽃은 진흙탕 속에서 피지 않던가.




오늘도 해가 뜨고, 나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 하루를 시작한다. 가족 간의 단절이 가져온 내 삶의 이어짐을 만끽하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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