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여성 인물이 나오는 연극이나 영화를 본 것이 언제인지? 소설에서 닮고 싶은 여성 인물을 발견한 적이 몇 번이나 있는지?
문학작품부터 광고까지 여성은 대개 비슷한 이미지로 묘사된다. 사람의 폭넓은 내면세계를 그려내야 할 문학 속에서도 여성은 ‘어머니’ 아니면 ‘성적 대상’, 둘 중 하나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이는 많은 작가의 좁은 시각 때문일 것이다.
특히 젊은 작가들의 글에서 여성상이 다양해지고 있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광고와 영화, 연극과 소설에서 여성은 성적으로 대상화된다. 이렇게 왜곡된 여성상이 범람하는 문화는 유지된다.
그러나 여성은 시인, 농부, 정치인, 과학자, 활동가, 그 누구도 될 수 있다. 우리는 이 사회와 세계의 구성원이자 자연계와 우주의 일원이다. 우리는 그 모두이고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단 하나의 단어로 우리를 규정할 수는 없다. 그대가 여성이든 남성이든 또 다른 성이든 그것은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나는 여성의 여러 면을, 특히 지금까지 부각되지 않았던 긍정적인 면면을 보여주는 작품을 쓰는 작가가 늘어나길 바란다. 사회가 정한 경계를 뛰어넘는 멋진 인물들을 다양한 작품에서 만나고 싶다.
기존의 인물들이 불만족스럽다면, 우리 스스로 새로운 인물을 창조할 수도 있다. 우리가 보고 싶은―예를 들면 강하고 적극적인 여성 인물을 누군가 다른 사람이 만들어낼 때까지 기다리고만 있을 필요는 없다.
우리에게는 사회의 경직된 이분법적 성별 구분에 얽매이지 않는 작품이 필요하다. 우리의 상상력과 관찰력, 지성과 감수성, 공감 능력을 포함한 풍부한 능력을 발휘해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다채로운 면을 인식하는 문화를 만들어갈 수 있다. 그 사람이 어떤 성이든.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서로의 진정한 모습을 보고 그 모습 그대로 존중할 수 있도록.
조카가 네 살 때 내 여동생에게 말했다. 남자만 경찰관이 될 수 있다고. 아마 남성 경찰관만 나오는 만화를 본 것 같았다. 그런 프로그램은 성별 고정관념을 강화할 수 있다. 내 동생은 조카에게 말해주었다.
“여자도 경찰관이 될 수 있어.”
대중매체는 많은 사람에게 큰 영향력을 미치는 만큼, 최대한 편견 없는 프로그램을 통해 성 평등한 문화를 만드는 데 이바지할 필요가 있다.
불필요한 성별 구분은 예전에 비하면 줄었지만 여전히 남아 있다. 언젠가 조카 내복을 사러 아이들 옷 가게에 들렀을 때였다.
“그건 여아 옷이에요.”
여동생과 내가 조그만 토끼가 그려져 있고 목둘레 부분이 연분홍색인 옷을 꺼내 보자, 가게 점원이 우리에게 말했다. 점원은 파란색과 초록색 내복을 보여주며 이게 남자아이 옷이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가 처음 본 옷이 가장 귀여워서 우리는 그 옷을 샀다.
지금은 1980년대도, 2000년대도 아니고 2020년대. 그런데도 성별에 따라 입는 옷 색깔도 달라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사라지지 않았다니. 조카는 우리가 사준 내복을 잘 입었고, 그 옷은 조카에게 잘 어울렸다. 연두색, 다홍색, 하늘색―우리는 색깔에 관계없이 가장 귀여운 옷을 조카에게 선물했다.
조카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며, 나는 동화 속의 성별 고정관념을 다시 한번 마주했다. 책을 읽자고 했더니 조카는 동화책을 몇 권 골라 내게 가져왔다. 그런데 여러 이야기의 줄거리가 비슷했다. 대개 ‘왕자’인 남자가 곤경에 처한 아름다운 여성과 사랑에 빠져 그 여성을 구하고 둘은 결혼한다. 이야기 속에서 여성의 외모가 평가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신데렐라>에서 신데렐라는 ‘무도회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으로 묘사된다. 왕자는 무도회에서 신데렐라와 춤을 춘 뒤, 신데렐라에게 묻지도 않고 신데렐라와 결혼하기로 한다.
<엄지공주>는 어떤가? 예쁜 엄지공주를 못생긴 엄마 두꺼비가 자기 아들과 결혼시키려 하다가, 탈출한 엄지공주가 꽃의 왕자와 서로 첫눈에 반해 그 자리에서 결혼하기로 한다.
이런 동화책들을 읽어주는 동안 내 옆에서 딱 붙어서 빠져들어 듣고 있는 조카를 보며 좀 난감했다. 이런 책은 어린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적극적 남성이 예쁜 여성에게 한눈에 반해 결혼한다, 이런 정형화된 이야기를 넘어 다른 이야기가 듣고 싶다. 멋있는 여성 인물의 이야기,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여성들이 (그리고 물론 어떤 성이든) 서로 연대하며 씩씩하게 헤쳐나가는 이야기.
우리에겐 남성의 언행으로 삶이 결정되는 수동적 여성 인물이 아닌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하다. 우리는 모두 강점과 약점이 있는 복잡한 존재다.
지난해에는 실직도 했겠다, 시간이 생긴 김에 오랫동안 미뤄왔던 동화책을 그리고 썼다. 적극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여성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그림책을 그려 조카에게 읽어주고 싶었다. 어린 소녀가 혼자 숲을 걷다 길을 잃지만 주위의 도움도 받고 용기를 내어 길을 찾는 이야기를 지어 조카에게 읽어주자, 조카는 귀 기울여 잘 들었다.
모든 어린이가 성별 고정관념에서 자유롭게, 자신이 어떻게 살고 싶은지 탐구하며 자라날 수 있기를 나는 바란다. 누구에게나 성별에 관계없이 자기 자신으로 살 권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