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아직, 조심스럽다

by 소극적인숙

덥지만 수연은 처럼 외출하기 위해 밖을 나섰다. 아이보리 색을 띤, 그녀가 평소에 아껴 쓰던 레이스 양산을 활짝 피며 햇빛을 잠시 막아본다. 얼굴은 붉게 올랐고 이마와 머리카락 사이의 땀은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런 그녀의 낯선 듯 반가운 모습을 지켜고 있는 한 노년의 남성이 있었다.


윤찬은 천천히 걸어오는 수연을 멀리서 지그시 바라보았다. 세월이 지나 살짝 굽은 듯 동그랗게 굳은 수연의 어는 단정하고 부드럽게 내려가 있었다. 양산 사이로 살짝 보인 그녀의 얼굴 위로, 내리쬔 햇살이 마침내 보인다. 빛 길을 따라 넘어선 수연의 그림자 마저 이제는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게 여겨졌다...

그 어떤 여자보다도...이 부셨다.


윤찬은 수연 곁에 가깝게 다가섰다. 마와 머리카락 사이로 인자한 주름 바탕으로 땀방울이 보였다. 그렇게 햇빛에 반사된 땀방울은 크리스털처럼 반짝거렸다. 두 사람은 화실로 향해 걸어가로 했다. 그들처럼 조금 굽은 언덕길을 따라 천천히 올라갔다가 내려가며 숨을 헐떡헐떡 쉬었다. 이렇게 더운 날은 천하장사도 이기지 못할 날씨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수연은 어색함을 느끼며 윤찬에게 살짝 투덜거려 본다.


그들은 그렇게 젊은 시절로 되돌아다. 어쩌면 시간이 이 두 사람을 위해 멈췄을지도 모른다. 모든 풍경은 변했지만, 수연과 윤찬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는지, 시간과 공간만 바뀐 듯 보였다. 대신 두 사람의 마음은 온전 지켜졌다.

윤찬은 수연에게 손을 올리라는 제스처를 취해본다. 수연은 쑥스러운 듯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이며 망설였다. 그러자 윤찬은 수연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너무 오랜만이라... 어색하지? 45년 만이라고 했나."

두 사람은 미소를 띠며 손을 꼭 잡고 걸었다. 수연은 잠시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며 대답했다.


"어쩌면 나만... 45년이었을지도 몰라. 너는 모를 거야."


"어째서...? 내가 모르는 다른 일도 있었나."


"아니, 그런 건 아니야. 그때는 어렸으니깐... 우리의 풋사랑이 나에게는 첫사랑으로 남았었겠지."

그러자 윤찬은 고민하는 듯 대답을 바로 하지 못했다.

두 사람의 사이에는 살짝 몇 초간의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정적을 깬 윤찬이 조금 높은 톤으로 힘주며 말을 했다.


"오히려 나에게는 첫사랑이 수연이고, 너였어."

정적을 깬 목소리에 깜짝 놀란 수연은 잠시 발걸음을 멈추며 윤찬을 마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알아. 그래서 네가 천천히 다가와줬잖아. 난 그게 고마웠어. 나의 마음을 알아준 거 같았거든."


"수연아... 그때 나도 너처럼 만나던 사람이 정리가 되고, 끝이 났다면 모르겠지만... 나는 그런 상황이 아니었으니깐 남자 답지 못했어."


"아니야... 충분히 남자다웠지. 내가 상처받을까 봐 그런 거 아니었어? 처음 시작할 때 우리... 참 조심스러웠던 거 기억나."

윤찬은 흐린 기억을 떠올리며 눈을 깜빡거렸다. 수연은 그런 그를 충분히 기다는 동안, 윤찬의 검은 머리카락 속에서 반짝이는 은빛깔의 머리카락을 하나, 둘씩 세워 보았다. 그 사이 윤찬은 뭔가 떠오른 듯 말하였다.


"음... 혹시 우리가 처음 바다여행 갔을 때 말하는 건가."


"응. 우리는 그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

혈기왕성한 남자와 여자가 한 침대에 누웠는데 말이지... 그저 뒤에서 내가 푹 잠들기를 바라만 봐줬어. 한 침대에 있었지만... 사실 나는 매우 어색했거든."

그 말에 윤찬은 허허 웃으며, 수연을 바라보았다.


"지금 떠올려보니 기억이 흐릿하네. 그랬네. 수연이를 그냥 가만히 놔두었단 말이지?"

윤찬의 안경에 비친 수연의 모습은 밝고 화사했다. 그 순간 수연은 젊어진 기분이 들었다.


'아는 지인이 지나가다가 당장 나를 본다면 회춘했냐고 하겠네.'

사랑에 빠진 모습이 이런 걸까 수연은 생각해 본다. 그리웠던 사람을 다시 만지만, 아직 실감이 나질 않는다. 오래 살고 봐야 한다는 게 이런 일인가 싶다. 부끄럽지만 이 나이에 다시 자신을 찾은 느낌이 들었다. 그 사이 심장이 쿵쿵 뛰며 얼굴이 붉어진 수연이었다.

옛사랑들이 떠올랐는지 필름처럼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러자 수연의 광대에는 분홍빛이 올랐다. 복숭아처럼, 과즙을 잔뜩 가진 과일처럼, 탐스러웠다.

대신 응어리 진 감정들이 따뜻하게 녹아내리고 있었다.


이 둘 사이의 사랑은 어떤 것일까. 마치 한 여름에 뜨거운 누룽지죽을 아침에 곁든 것 같다. 밥 알이 부풀어 오르며 톡톡, 따뜻하게 그리고 반듯하게 눌리는 것처럼, 그 누룽지들이 뜨거운 물에 사르륵 녹듯이 말이다. 수연의 마음도 그러했다.


처음엔 뜨거워서 호호 불며 식혀야 먹을 만 해진다. 대부분의 죽이 그러하니, 우리는 부드럽게 넘기기 좋 맛도 좋으면서 영양가 있는, 속이 든든해지는 죽을 찾는다.

너무 다채롭게 먹으면 첫 숟가락에 속이 데기 쉬우니, 천천히 부담스럽지 않게 속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죽을 찾아 먹는다. 수연은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현재까지 윤찬과 함께 다시 시작하는 날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았다.


편지로는 모든 마음을 담아낼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남편 재현의 빈자리를 느낀 이후로 매일 같이 꿈에 찾아오던 그 사람이다. 그래서 윤찬과 이제는 제법 가까워졌으니 함께 있는 이 순간 모든 걸 잊고 살기 싫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릴 두고 흉을 보면 어쩌지."

수연의 말 끝에 윤찬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심호흡을 하며 다시 수연을 설득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욕하더라도, 욕을 안 하는 이도 있고, 욕을 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한 번쯤은 욕을 들어보는 일도 있겠지."

수연은 다소 당황하며 모든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끝내 윤찬은 울분에 찬 듯 수연에게 감정을 호소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 글쎄... 이러쿵저러쿵! 뭔들! 우리는 어떤 이야기라도 나오겠네."

답답한 듯 윤찬은 하늘을 보며 말을 건넸다.

늦게라도 두 사람이 돌고 돌아 만났으니, 한 구석 저 멀리 넣어둔 마음이 이상하게 요동쳤다.


윤찬에게 민정은, 민정에게 윤찬은 서로에게 힘이 되었지만 거기까지였다. 서로가 처한 상황을 알고 만난 두 사람은 암묵적인 거래를 했기 때문이다.


인생은, 결혼은 어차피 타이밍이라며, 두 사람은 백년해로를 맺기로 했으니 이왕 이렇게 친구에서 연인 되는 모습도 나쁘지 않았다. 어쩌면 서로가 구차하게 매달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고 윤찬은 얘기한다. 아직은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겠거니 싶더라도, 그냥 지나치기엔 곧 죽을 날이 오지 않는가. 서로가 서로에게 속 편하게, 든든하게 바라봐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여겼다.


수연은 시간의 흐름 따라 둘의 건강이 닿는 한, 미래를 조금씩 그리며 함께 해보려 한다. 대신 가족들의 설득이 필요하다. 어느새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걱정하는 수연의 마음을 위로하듯 찡긋거린다.

적어도 수연 앞에서만큼은 청년 시절의 윤찬이었다.


"어이구... 밖에서 이러면 두 노인네가 무슨 소란인가 합니다. 얌전히 곱게 걸어갑시다요."

수연은 조금 붕 뜬 윤찬을 말려본다. 그런데 저 멀리서 익숙한 사람이 이쪽으로 걸어온다. 수연의 가족이다.


"윤찬아! 제... 발... 잠! 깐! 만!"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찬은 화들짝 놀라 수연의 눈치를 봤다.

수연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그의 손목을 잡은 채 그대로 굳었다.


"왜 그래... 왜? 왜? 무슨 일인데 갑자기 소리를..."

화들짝 놀란 윤찬은 연의 얼굴을 살피다가


"저기! 저... 서점 안으로 들어가자. 지금은 안돼. 지금 여기서 마주치면..."


수연은 말끝을 흐리며 저 멀리서 걸어오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애써 웃으며 윤찬을 다시 다봤다.

윤찬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토요일 연재
이전 13화수연의 이야기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