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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lda Mar 10. 2017

Moscow. 상상 속의 모스크바

유럽의 열두 수도 이야기 - 셋. 러시아, 모스크바 (1)

 

여행 중 거쳐 가는 그 어떤 도시도 설레지 않는 곳은 없지만, 모스크바는 어쩔 수 없이 조금 더 특별한 두근거림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러시아가 서유럽이나 남유럽의 국가들보다 지리적으로는 우리와 좀 더 가까울지 모르지만, 심리적으로는 한참이나 멀고 또 그만큼 어려운 나라이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러시아를 처음 ‘제대로’ 인식한 건 ‘피의 일요일’ 사건에 대해서 읽으면서였다. 물론 그 이전에도 도스토예프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y)를 읽고 유리 가가린(Yuri Alekseyevich Gagarin. 소비에트 연방의 우주비행사로, 인류로서는 최초로 지구 궤도를 도는 우주 비행을 하였다.)에 대해서 배웠지만 그들을 그저 한 명의 인간으로만 생각했지, 러시아라는 국가와 크게 연관시켜 생각하진 않았다. 그런데 성인이 된 후, 역사에 좀 더 흥미가 생기고 그래서 이런저런 책들을 찾아 읽다가 ‘피의 일요일’ 사건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사건은 내게 너무나 선명한 이미지로 남았고, 때문에 그 이후 오랫동안 그 사건이 일어났던 장소에 직접 가보고 싶었다.


무리를 해서라도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에 가고 싶었던 것은 그런 이유였다. 물론 제이와의 대화와 타협을 통해 결국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포기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모스크바를 보고 붉은 광장을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설렜다. 때문에 모스크바 국제공항에 내려 입국 수속을 밟을 때, 적당한 미열에 시달린 것을 그 설렘 때문이라고 여겼다.  


스페인의 안달루시아 지방과 포르투갈의 리스본을 둘러본 후, 그 여행의 마지막 도시인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조금 긴장을 했는데, 다행히도 셰레메티예보 공항(Sheremetyevo International Airport)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공항과 바로 연결되어 있는 공항 철도역에서 아에로 익스프레스(Areo express)를 타면 중간 정차 없이 한 번에 모스크바 시내의 중심인 벨로루스까야역까지 갈 수 있었다.





왜 그랬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모스크바에서 우리는 지인으로부터 소개받은 한인 민박에 머무르기로 했다. 아마도 모스크바에서 적당한 숙소를 찾기 어려웠거나, 아니면 여행의 막바지에 이른 만큼 조금은 편한 곳에서 지내고 싶었던 이유일 것이다. 어쨌든 이 민박집으로 가려면 우선 아르바카야역까지 가야 했다.


벨로루스까야역에서 아르바카야역으로 가려면 한 번 환승을 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우리는 잠시 고생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까지만 해도 모스크바 지하철역에는 영어로 된 표지판이 전혀 없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나아졌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러시아어는 우리에게 그냥 기호 같은 것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고 때문에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문맹이 된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이것이 2016년 모스크바 지하철 노선도. 복잡하기도 복잡하지만 일단 처음 보면 역 이름 자체가 잘 구별되지 않는다.



다행히도 환승역이 우리에게 선사한 그 미로 속에서는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빠져나왔다. 그리고 무사히 아르바카역에 도착해 길 잃은 아이들 마냥 주위를 둘러보고 서 있으니, 저쯤에서 우리가 묵을 민박집의 주인아주머니일 것이 분명한, 한국인 아주머니 한 분이 걸어오시는 것이 보였다.


도착한 후에야 알게 된 것이지만, 아주머니는 자신과 가족들이 사는 집은 민박집 1호점으로, 그리고 같은 아파트 내에 있지만 동은 다른 곳에 있는 곳을 2호점으로 이용하고 계셨다. 우리가 짐을 푼 곳은 2호점이었는데, 방이 세 개쯤 되고 주방도 꽤 넓은 곳이었건만 예약되어 있는 사람이 우리밖에 없었다. 덕분에 나와 제이는 2박 3일 동안 그 민박집 아파트 한 채를 우리 집 마냥 편하게 썼다.





우리가 묵었던 민박집 앞에 있는 외무성 건물. 모스크바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 중 하나로 손꼽힌다는데, 나는 그 아름다움을 전혀 담아내지 못했다.

  

  

모스크바는 러시아 최대의 도시이자 유럽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이며 인구 순으로 보았을 때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큰 도시이다. 1147년, 유리 돌고루키 대공이 이곳에서 잔치를 열면서 모스크바라는 도시가 처음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고 한다. 중세 러시아 때는 별 비중 없는 지역이었지만,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러시아 남부가 전멸한 이후에는 중심 도시로 떠올랐다. 몽골의 통치에서 독립을 이룬 후, 이반 4세가 '차르'로 즉위하면서 '모스크바 러시아'가 성립되었다. 이후 14세기부터 18세기 초까지 수도 역할을 하였으나, 1712년 표트르 1세에 의해 러시아의 수도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겨졌다. 

  

모스크가 다시 수도의 지위를 되찾게 된 것은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볼셰비키 정부가 천도를 감행하면서였다. 1922년, 소련이 건국할 때 공식적으로 소련의 수도가 되었다. 1991년, 소련 붕괴 직후 모스크바는 마피아와 매춘부들이 득세하는 도시로 변해버렸지만, 경제 위기를 벗어난 지금은 다른 유럽의 대도시와 비교했을 때 크게 나쁠 것 없는 치안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니까 모스크바로 여행을 가겠다는 나에게, '거긴 위험하지 않아? 다른 좋은 나라도 많은데, 왜 하필 러시아야?'라고 묻는 사람들의 우려 같은 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보다 진짜 문제가 된 것은 모스크바가 ‘관광객 따위는 필요 없어!’라고 말하기라도 하듯 콧대 높게 구는 도시라는 사실이었다.


지난 2014년, 한국과 러시아의 비자면제 협정 발효되면서 현재는 비자 없이 60일 동안 러시아 체류가 가능해졌다. 하지만 우리가 러시아를 찾았던 때만 해도 러시아를 여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비자를 발급받아야 했다. 붉은 광장(Red Square)이니 크렘린(Kremlin)이니 하는 역사적 건물들을 꼭 보고 싶다고 제이를 부추긴 건 나였지만, 막상 비자까지 따로 발급을 받으려고 하니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여권 발급 비용은 10만 원 가까이 들었고, 발급 기간도 일주일이 넘게 걸렸다. 게다가 우리처럼 단순한 여행객이라도 일주일 이상 러시아에 머물려면, 러시아 이민국에 가 거주 등록 신고를 해야 했다. 그러니까 이쯤 되니, 이 모든 걸 미리 알고 있었다면 모스크바 여행을 포기했을 거란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모든 난관에도 모스크바 여행을 포기하지는 못한 우리는, 여행 기간을 줄이는 타협 끝에 결국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모스크바 여행을 시작하기 위해, 우리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아르바트 거리(Arbat Street)였다. 이 거리는 구 아르바트와 신 아르바트로 나뉘는데, 구 아르바트의 경우 모스크바에서도 가장 오래된 거리라고 한다. 때문에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구 아르바트 거리와 달리, 신 아르바트 거리는 현대 도시의 일반적인 거리와 별로 다를 바가 없다.


'어머니 인형'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러시아의 전통 인형, 마트료시카(Matryoshka).


지하철역으로 찾아가려면 스몰렌스카야 역과 아르바츠카야 역 사이가 바로 아르바트 거리인데 우리가 묵었던 숙소는 아르바츠카야역 앞에 있었다. 그러니까 숙소를 나와 왼쪽으로 가면 구 아르바트 거리를 구경할 수 있었고, 오른쪽으로 가면 그 유명한 붉은 광장에 닿을 수 있었다. 역사책 속에서나 만날 줄 알았던 이름들이 바로 내 옆에, 버스나 전철을 탈 필요도 없이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설렜다. 그 설렘을 조용히 견디고 있자니 곧 다시 미열이 났고, 그리고 곧 편도가 아파와서 그제야 깨달았다. 그러니까 모스크바에 도착한 순간 나는 감기에 걸렸던 것이다.   


원래 잔병치레를 자주 하지 않는 편이라, 낯선 곳을 끊임없이 떠돌아다니면서도 지난 20일 간 건강하고 튼튼하게 여행을 잘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모스크바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힘을 잃었다. 어떻게 찾아온 도시인데, 여기서 아플 순 없다! 생각을 하며 부랴부랴 긴 바지를 하나 사 입고, 민박집 아주머니께 감기약을 하나 얻어다 먹기도 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나는 추웠고, 피곤했으며, 나 때문에 제이의 여행까지 망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더 이상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그대로 여행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결국 모스크바 거리로 나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시 숙소로 돌아와 침대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푸쉬킨의 생가와 빅토르 최가 그려진 벽을 보고 싶었지만, 견딜 수 없는 무게로 잠이 몰려왔다. 결국 눈을 감았고, 잠이 들었고, 다시 눈을 떴을 땐 어느새 모스크바에 저녁이 와 있었다.  




평범하게, 아름다운, 밤의 아르바트 거리.



고작 2박 3일 일정에, 하루를 이렇게 보내버린 것이 너무 아쉬워 슬쩍 창밖을 내다보았다. 도시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다시 한번 우산을 받쳐 들고 아르바트 거리로 나가 보았다. 비속에서 반짝이는 아르바트 거리는, 다른 유서 깊은 도시들의 거리가 그러하듯 평범하게 아름다웠다. 그럼에도 그 거리를 걷고 있자니,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내가 이 거리에 있었다는 기억은 지워지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1. 피의 일요일 - 1905년 1월 22일, 제정 러시아의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발생한 유혈사태이다. 이 사건은 시작은 같은 해 1월 9일, 게오르기 가폰 신부의 주도 하에 진행된 청원 행진이었다. 청원의 내용은 노동자의 법적 보호, 헌법의 제정, 기본적 인권의 확립 등으로 착취, 빈곤, 전쟁에 허덕이던 당시 러시아 민중의 소박한 요구를 대변한 것이었다. 행진에 앞서 거행된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전체 노동자 18만 명 중 11만 명에 이르렀다고 전해지며, 행진 참가자 또한 6만 명에 달했다. 하지만 당시 러시아 민중은 황제 숭배의 관념을 여전히 지니고 있었고, 때문에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직접 탄원을 하면 상황이 개선되리라 믿었을 뿐 폭동을 일으킬 뜻은 전혀 없었다. 심지어 그들은 차르의 만수무강과 왕가의 번영을 기원하는 성가를 부르며 황제의 겨울 궁전으로 향했다. 그런데도 당국은 군대를 동원했고 비무장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다. 대포도 함께 발사했을 뿐 아니라, 그 이후 황제의 기병대가 돌진하여 칼까지 휘둘렀다. 이렇게 하여 거룩한 주일은 피의 일요일이 되었다. 발포로 인한 사망자 수는 불명확하다. 반정부 운동 측의 보고에서는 4,000명 이상에 이르렀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정확하지 않다. 이 사건은 모스크바 시내로 빠르게 퍼졌으며, 시내 곳곳에서 폭동과 약탈이 이루어졌다. 가폰이 조직했던 노동자 집회는 당일 해산되었고, 가폰은 즉시 러시아 제국을 떠났다. 같은 해 10월에 귀국했지만 이듬해인 1906년 4월에 사회혁명당에 의해 암살되었다. '이제 차르는 없다. 하느님도 없다.'라던 가폰 신부의 말처럼, 이 사건의 결과 황제 숭배의 환상은 깨어졌다. 결국 이 사건이 20세기 초 벌어진 러시아 혁명의 시발점이 되었다.


2. 상트페테르부르크 - 러시아 제국의 차르였던 표트르 대제가 1703년 설립한 도시로 1713년부터 1918년까지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다. 다수의 학술 연구기관, 미술관, 박물관 등이 있어 학술·문화의 중심지이며, 도심은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각종 러시아의 혁명에서 중심 역할을 했다. 세계 2차 대전 당시, 1941년 8월부터 29개월 동안 독일군에 포위당한 상태로 40만 명이 아사(餓死)당하면서까지 지켜낸 도시라고 하여 영웅 도시라고 불리기도 한다. 소련이 해체될 때까지 '레닌그라드'라고 불렸다가,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름을 바꾸었다.


3.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시킨(Aleksandr Sergeevich Pushkin) - 러시아의 시인이자 소설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대위의 딸> 등의 작품을 남겼다.


4. 빅토르 최 - Victor choi. 1962년, 카자흐스탄 공화국에서 태어난 소련의 록 가수이자, 싱어송라이터 겸 영화배우이다. 소련의 록 그룹인 키노(КИНО)의 리더였다. 한국인 아버지와 우크라이나인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정치적 메시지가 담긴 노래들을 많이 만들었으며, 소련 젊은이들의 영웅이었다. 소련 역사를 움직인 13명의 위인 가운데 한 명으로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 아르바트 거리에 이 빅토르 최를 추모하는 벽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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