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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단단 Aug 29. 2024

이보다 멋진 여름방학 대청소가 있을까

08. 스스로 생각하려는 태도, 자주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잘하는 것인 줄만 알았던 내 어린 시절과는 다르게, 요즘의 교실에선 꽤나 적극적인 질문들이 오고 간다.



"선생님, 저  티커 가져와서 더 꾸며도 되나요?"


"선생님, 오늘 급식 개수가 많은데 제가 도와줘도 되나요?"


"선생님, 보드게임 순서 때문에 들이 자꾸 우는학급회의  얘기해 봐도 되나요?"



질문 하나하나아이들의 조그만 머리에서 피어났다는 생각이 들면 하나도 귀하지 않을 것이 없지만, 그중에서도 '자기 생각'이 오롯이 담긴 말들은 특히나 귀하게 들린다.  무관하게 사람이라면 응당 가지고 있을 줏대가 말로 표현되는 것 같달까.


어쩌면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이 익숙한 내 성격 탓에 이 말들이 유달리 특별해 보일지도 모른다. 나이는 곱절로 먹었지만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일에 자신감보다는 부담감이 훨씬 큰 내게 아이들의 자발적인 질문들은 생경할 따름이다. 여하튼, 하루에도 수십 번씩 종이비행기 마냥 툭툭 날아와 꽂히는 말들에 묻어있는 열두 살 아이들의 자아는 정말이지 기특하고 경이롭다.






어느 해 방학식의 일이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르는 후텁지근한 여름, 1학기의 마지막 날이었다. 평소에는 당번을 정해 돌아가며 교실 청소를 하지만 방학식 날에는 웬만하면 모두 함께 대청소를 한다. 한 학기를 깔끔히 마무리하자는 의미도 있고, 대청소야말로 기다리고 기다리던 여름방학에 도착했다는 것을 실감 나게 해주는 가장 명확한 방학 전야제이기 때문이다.


스물네 명의 아이들이 동고동락한 흔적이 남아있는 교실은 찬찬히 뜯어보면 청소할 곳이 참 많다. 바닥 쓸기, 대걸레로 바닥 닦기, 칠판 앞과 사물함 위 닦기, 분리수거, 신발장 정리 등등. 모두에게 하나의 역할이 돌아가게끔 나누는 것은 내 몫이고 가위바위보로 하고 싶은 역할을 쟁취하는 것은 아이들의 몫이다.


예상외로 가장 인기가 많은 일은 교실 밖을 나갈 수 있는 분리수거였고, 예상대로 가장 인기가 없는 일은 바닥 쓸고 닦기였다. 하루 청소를 정할 뿐인데도, 평생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것 마냥 가위바위보의 열기는 뜨거웠다. 장장 20분 간의 혈투 끝에 각자의 역할을 정했고, 창문을 열고 책걸상을 복도로 옮기면서 대청소가 시작됐다.


유난히도 더운 날이었다. 교실과 복도 창문을 활짝 열어놓으니 뜨거움을 머금은 습한 바람이 잔뜩 들어왔다. 금세 더워진 교실 속에서 아이들은 땀방울을 흘리며 맡은 일을 끝내기 위해 부산스러웠다. 


청소를 시작한 지 10분쯤 지났을까, 교실을 한 바퀴 둘러보는 데 뒤편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재훈이가 눈에 띄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이리저리 흐트러진 보드게임들을 테트리스하듯 책장에 정리하고 있었다. 보드게임을 정리하는 역할은 따로 정하지 않았는데 싶어 재훈이에게 물었다.



"재훈아 너 뭐 해?"



"아 저 1분단 바닥 닦긴 데요, 아직 애들이 안 쓸어서 이거 정리하고 있으려고요"



"그래? 네가 그냥 하는 거야?"



"아 네, 대청소할 때 같이 하면 좋을 것 같아서요. 지금 어차피 기다려야 하고요. 해도 되죠?"



'물론이지'라는 대답을 듣자마자 다시 무릎을 굽혀 보드게임을 정리하는 재훈이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누가 시킨 일도, 반드시 해야 하는 일도 아니건만 그 짧은 시간에 자신이 할 일을 스스로 찾아서 한 것이다. 더없이 선한 마음으로 말이다.








시간이 꽤 흐르고 청소를 먼저 끝낸 아이들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다. 할 일을 다하고 실에 우두커니 서있던 주한이가 갑자기 양손에 물티슈를 들고 오더니 물었다.



"저, 선생님"



"응?"



"저 사물함 위 닦는 거 다 끝났는데요. 아까 보니까 신발장 청소가 먼지가 많아서 오래 걸리는 같더라고요. 혹시 신발장 청소 도와줘도 돼요?"




정말이지, 기특한 물음이었다. 주한이도, 아까의 재훈이도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내려 하지 않았다. 신발장 청소가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이었는지, 해야만 할 것 같이 느껴서 한 일인지는 모른다. 그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스스로 정하는 모습이 대견할 따름이었다. 


똑같은 시간 속에서 누군가는 '자기 생각'에 따라 스스로 행동을 결정하며 살고, 또 누군가는 일이 주어질 때까지 마냥 기다리며 산다. 열두 살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사는 이 작은 교실에서도 그렇다. 라면 이 시간 동안 스스로 할 일을 찾을 수 있었을까. 재훈이처럼 묵묵하게, 아니면 주한이처럼 물어봐서라도 허락을 구하고 원하는 바대로 행동할 수 있었을까, 뭇 부끄러워진다.


대청소는 한 시간을 꼬박 채워 끝이 났다. 청소를 마친 재훈이와 주한이는 시원한 바람 밑에서 그새 웃고 떠들며 장난치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교실이 반짝거리는 기분이었다. 






가끔, 주어진   했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 이 대청소날이 불현듯 생각난다. 


나는 오늘 내가 뜻한 하루를 살았을까.

내 생각대로 나를 이끌었을까.


어디에 있든 떤 상황에 있든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려는 마음. 지금도 자신의 인생 앞에 수많은 발자국을 찍으며 살고 있을 재훈이와 주한이를 떠올리며, 점점 흐릿해져 가던 나의 발자국도 인생의 순간순간에 또렷이 남기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자주] 스스로 일을 처리할  있는 능력이나 성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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