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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단단 Sep 05. 2024

현수의 물통에는 '공책 가져오기' 포스트잇이 붙어있다

09. 더 나은 방향을 향해, 의지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수를 하고 산다.


무심코 친구나 직장동료에게 말실수를 하기도 하고, 회사에서 깜빡하고 해야 하는 일을 놓치기도 한다. 순간의 감정적인 판단으로 일을 그르치는 경우도 있고, 잘 알지 못해서라는 이유로 실수를 하기도 한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맺고 끊으며 살면 좋으련만 사람은 어쩔 수 없는 사람인지라, 본디 허술하게 태어난 부분을 메꾸고 사는 것만으로도 최선을 다하는 삶이다.


하지만 무심코라거나, 깜빡이라거나, 무지로 인한 실수의 순간들을 모든 사람이 채우 살지는 않는. 실수는 누구나 수 있지만, 누구나 그 순간을 자세히 살펴보고 꿰매고자 노력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더 나은 방향을 찾기 위한 의지가 꼭 보편적인 마음은 아니라는 뜻이다. 당장 나부터도 마찬가지다. 머리가 커질수록 실수를 만회하려기보단 회피하거나 합리화하는데 에너지를 많이 쓰곤 한다.  


정답 없는 인생에서 조금이나마 더 나은 방향으로 걸어가고자 하는 의지. 나이가 들수록 희미해져 가는 그 마음을 초등학교 5학년 아이에게서 우연히 발견한 적이 있다.






5학년 현수는 또래 친구들에 비해 이삼 년 정도 느린 아이였다.


같은 반 친구들이 분수의 곱셈을 할 때 구구단을 다시 외우고, A4 한 장 짜리 생각글쓰기를 할 때 간신히 한 문장을 쓰는 아이였다. 학기 초, 몸집이 작고 왜소한 데다 학습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현수가 고학년이 되어 아이들과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했던 기억이 난다. 다행히 현수는 어울리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고, 당시 우리 반도 한 명을 소외시키지 않고 함께 노는 분위기 나름대로 만한 학교생활을 할 수 있었다.


현수가 그저 초등학교 생활을 즐겁고 안전하게만 하기를 바랐던 부모님 뜻에 따라 공부를 억지로 시키진 않았다. 수업 시간에 상상의 나래를 잔뜩 펼치는 현수를 보고 안 되겠다 싶어 어, 수학만 복습하게 했그 외에 것은 마음 가는 대로 하게 했다.


그런데 딱 한 가지, 학교생활에 필요한 준비물을 스스로 챙겨 오는 일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다. 간은 계속 흐를 테고 이 아이는 어찌 됐든 곧 중학생이었다. 공부가 어려워도, 의사소통이 서툴러도 자신이 일이나 가져와야 할 물건은 스스로 챙길 수 있어야 했다. 언제까지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챙겨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떻게 보면 훗날의 자립을 위한 첫 번째 단추를 채워주어야 할지도 몰랐다. 





2학기 초가을의 어느 날이었다.


우리 반 아이들의 루틴 중 하나는 배움 공책을 쓰는 것이다. 하루 동안 수업시간에 공부한 내용과 었던 일을 적 공책이 없으면 친구에게 빌리거나 이면지에라도 적어서 검사를 맡고 가야 했다. 매일 쓰는 터라 공책이 금방 닳아서 다 쓰면 스스로 새로운 공책을 챙겨 오는 것이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그런데, 현수가 공책을 끝까지 다 썼는데도 새로운 공책을 갖고 오지 않았다. 아니, 가져오는 방법을 모르는 것일지도 몰랐다.



"현수야, 공책 다 썼으면 새로운 걸 가져와야지. 여기 뒤표지에 쓰지 말고"



"네"



"공책 가져올 거지?"



"네, 가져올게요"



다음 날 공책 검사 시간이었다. 현수는 아직도 쓰던 공책 맨 뒷장에 이면지를 붙여 가져왔다.


  

"현수야, 공책은?"



"못 가져왔어요"



"왜 못 가져왔어?"



"까먹었어요, 가져올게요"



그다음 날 공책 검사 시간이 되었다. 오늘은 챙겨 왔을까,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현수가 건넨 공책을 보니 이번에도 똑같이 쓰던 것이었다. 이번에는 이면지를 붙이지 않고 공책 중간의 빈 공간을 모아 글을 써왔다. 이쯤 되니 고민이 됐다. 사실, 교실에 남는 공책을 주는 방법도 있었고 부모님께 직접 공책 좀 챙겨달라고 부탁하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현수가 직접 생각해서 가져오는 것이 맞았다. 나는 기다려야 했고 현수는 배워야 했다.



"현수야, 공책 언제 가져오려고?"



"진짜 가져오려고 했는데.. 못 가져왔어요"



현수는 자기도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선생님, 저 손바닥에 적어갈게요"



그러고서는 굵은 검은색 펜을 들더니 손바닥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공책'이라고 적었다. '내일은 꼭 가져올게요'라는 현수의 의지가 보다. 지만, 노력이 무색하게도 다음 날도 현수는 공책을 가져오지 않았다. 아침부터 뭐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계속 눈을 피하던 현수가 사부작사부작거리더니 내게 먼저 다가와 말 건넸다.



"선생님, 저 못 가져왔어요"



"그래?"



"저 그래서 이렇게 했어요"



현수는 다짜고짜 매일 가지고 다니는 자기 물통을 들이밀었다. 물통에는 네모난 초록색 포스트잇 하나가 붙어있었는데, 큼지막하고 삐뚤빼뚤한 글씨로 [공책 가져오기]라고 적혀있었다. 어떻게든 가져오려고 방법을 생각해 낸 것이다. 



"물병 매일 닦으니까, 여기 붙여놓으면 돼요"



현수의 눈빛에 결의가 느껴졌다. 정말이지 노력이 기특했고 의지가 가상했다. 이런 모습이라면 내일은 정말 가져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다음 날, 드디어 현수는 공책을 챙겨 왔다.



"선생님, 가져왔어요!"



공책 하나를 가져오는데 일주일이 걸렸다. 현수가 빳빳한 새 공책을 보여주며 환하게 웃는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어떻게든 해보려고 노력하는 마음. 물통과 포스트잇을 써서라도 자꾸 잊어버리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마음. 공책을 가져오라고 시킨 것은 선생님이지만, 공책을 가지고 오기 위해 노력한 영역은 오롯이 현수의 몫이었다. 물통에 달랑거리며 붙어있던 '공책 가져오기' 포스트잇 조금은 근사하게 느껴졌다. 






활력보다는 무기력이, 긍정보다는 냉소가 익숙해진 세상이다. 시니컬해지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세상이라 그럴까, 생각할 것이 워낙 많은 세상이라 그럴까, 내 안의 사소한 실수를 보완하려는 마음이나 소박한 목표를 향해가는 마음을 떠올리는 일이 시류에 맞지 않는 덧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더 나은 사람으로, 더 나은 방향으로 살아가려는 의지가 퇴색되는 것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현수 같은 아이를 볼 때면 잊고 있 삶에 대한 의지와 노력이 불쑥 올라온다. 이 작은 아이의 내고 싶다는 의지와 해결책을 찾고자 애쓰는 모습을 보면 생(生) 앞에 겸손해진다. 



얼마 전, 우연히 봤던 한 가수의 인터뷰가 떠오른다. 인생에서 가장 두려운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조금의 성장도, 발전도 없이 나이 든 내 모습을 보는 것'이라는 대답이었다. 어쩌면 부끄럽지 않게 산다는 건 할 수 있는 일은 꾸준히 해내고, 부족한 점은 채우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간다는 뜻이 아닐까.

스스로에게 어제보다 더 나은 방향으로 가고자하는 작은 의지 하나 품을 기회를 기꺼이 허용한다면, 조금이나마 후회하지 않을 내일이 펼쳐질 것이라 믿는다.

 



 [의지] 어떠한 일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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