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것은 지나간 데로 의미가 있지만
그 여름은 태양이 머리 위에서 지글지글 타오르듯 뜨거웠고 보도볼록에서는 숨이 막힐 정도록 후끈한 열기가 올라왔다. 정숙은 막 오픈을 한 쇼핑몰 2층에 있는 음식점으로 문을 열고 들어섰다. 도로가 쪽으로 큰 통유리가 있어서 밖이 한눈으로 내다 보였다. 길 건너편엔 거대한 KTX 역이 가로로 길게 놓여있었고 새로 지은 지 얼마 안 된 티를 마구마구 뽐내고 있었다. 정숙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현희를 기다리면서 앉을자리를 두리번거리며 찾았다. 신발을 벗고 앉아야 하는 자리가 불편해서 다른 곳으로 장소를 옮길까도 싶었지만 후덥지근한 바깥날씨가 짜증스러울 만큼 싫었기에 얼른 에어컨 밑으로 자리를 잡았다. 등뒤로 스탠드형 에어컨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가 마치 사우나에서 땀을 잔뜩 빼고 냉탕으로 쏜살같이 달려 들어가서 등판에 냉수마찰을 하는 것처럼 시원함을 넘어 섬뜩하리 만큼 소름이 돋았다.
현희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약속 시간을 잘도 못 지킨다. 정숙은 그녀에 비해 시간약속이 철저하다. 그런 이유로 현희와 함께 일을 하는 동안에 싫은 소리를 몇 번이나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현희는 매번 미팅이 있을 때마다 시간이 늦었다. 오늘도 그녀는 어김없이 약속장소에 늦게 나타났다. 직장생활을 할 때도 시간을 못 지켰던 그녀에게, 무엇을 더 이상 기대하나 싶은 것이 정숙은 피식하고 웃음이 나와버렸다.
정숙보다 4살이 많은 현희는 삼십 대 중반에 결혼을 해서 최근엔 셋째를 낳았다. 현희가 첫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 정숙은 그녀의 남편으로부터 전화를 받게 된다.
"안녕하세요? 정숙 씨, 조금 전에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통화가 안되네요. 집에 아내가 있긴 한 것 같은데 확인 좀 해줄 수 있으신지요? 아내가 아침에 몸이 많이 피곤했거든요."
현희는 신혼살림을 인천 어느 빌라촌에서 시작했다. 시어머님께서 투자를 위해 사둔 집이란 소릴 그녀로부터 언뜻 들은 것 같다. 건강한 사람이리도 인천에서 수원으로 출퇴근을 한다는 건 무리가 되는데 임신한 그녀에겐 더 버거웠을 것이다. 현희는 결국엔 혈당이 급격히 올라가는 바람에 뱃속 아기에게 무리가 가면 안 된다는 의사에 권유로 직장을 그만두고 주부로 지내게 되었다. 그런 현희를 정숙은 인천도 아닌 천안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키가 눈에 띄게 작은 현희가 드디어 닭갈비집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녀는 약속시간이 늦었다면서 뭐라 뭐라고 입속말로 구시렁거리더니 담벼락으로 구렁이가 슬그머니 넘어가듯 자리에 앉았다. 예전이나 세월이 한참 지난 지금도 변함없는 그녀다. 강원도 춘천이 고향인 현희는 정숙의 고향인 천안에 자리를 잡았다. 천안이 고향인 정숙은 서울에서 수원으로 그리고 춘천에서 다시 서울로, 또다시 수원에서 인천으로 지금은 J회사 아프리카 케냐 지사로 발령을 받았다. 그 긴 여정 속에서 정숙은 춘천에서 현희를 만났다. 교회에서 처음 만난 현희는 마음씨가 좋은 언니였다. 그러다가 정숙이 다니던 직장에 현희가 신입사원으로 입사를 했다. 정숙은 이미 J 회사에서 일한 지 5년쯤 되었다. 정숙은 그전부터 인턴생활을 꽤 오래 동안 했었던 터라 정직원이 되고부터는 능숙하게 일처리를 하는 바람에 상사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정직원 1년 차가 되면서 막 오픈한 수원지점에 책임자로 발령을 받았다. 정숙이 1년 동안 거의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한 터라 지점의 성과가 좋았으므로 본사에서는 인턴을 마친 현희를 정숙이 근무하는 수원지점으로 발령을 냈다. 그러나 좋은 언니는 언니로서 남아있어야지 만 좋은 관계로 이어진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직장생활은 동료들 간에 사이가 좋은 관계보다는 성과를 내야만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현희는 회의와 미팅이 있을 때마다 늦게 나타났고 돈에 대한 계산이 정확하지 않았을뿐더러 자주 일하는 시간에도 연락이 두절되곤 했다. 어느새 정숙은 현희에 대한 실망감이 커져갔고 신뢰감은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특별히 시간을 지키지 못하는 현희에 대해서는 이미 인턴생활을 함께 한 그녀의 동기들이 잘 알고 있었고 J회사 상사들까지도 알정도였다. 시간이 늦을 때마다 현희에게는 많은 이유들이 있었다. 오늘은 약속 시간에 늦은 그녀가 밉지 않게 보이는 이유는 이해관계가 전혀 엮이지 않은 가벼운 만남이라고 밖엔 설명이 안 되었다.
천안아산 KTX 역으로 빠른 속도로 들어서는 기차의 흔들림이 길 너 편에 있는 2층 식당까지 느껴졌다. 해가 중천에 뜬 정오 12시 20분, 한낮에 거리는 한산하다. 전철역에서 막 내린 듯한 몇 명의 젊은이들만이 가로수로 심은지 얼마 안 된 연둣빛 잎사귀가 엉성한 나무밑에서 잔뜩 눈살을 찌푸리며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길 기다리고 있었다.
현희는 젊은 아르바이트생에게 부랴부랴 닭갈비와 조롱이떡과 가락국수를 곁들여서 주문을 했다. 짧은 검은색 앞치마를 허리에 두른 직원이 스테인리스 물병을 냉장고에서 꺼내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현희는 목이 탔는지 찬물을 마시면서 시원한 사이다 한 병을 주문했다.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정숙은 현희에게 안부를 물었다.
“천안에서 생활은 어떠세요?”
정숙은 첫째 아이를 낳고 캐나다로 이민을 준비하다가 비자가 안 나오는 통에 갑자기 행선지를 필리핀 앙겔레스로 잡았다고 했다. 그곳엔 J회사 지사가 있었다. 예전 직장 동료들의 도움으로 그녀는 십 대 유학생들 상대로 홈스테이드를 하면서 생활비를 벌었는데 그 일도 쉬운 게 아니라고 했다.
"경산에서 온 목사님 아들이 게임 중독으로 통제가 안 되는 거예요. 잠자기 전에 스마트폰을 반납해야 하는 게 원칙인데 몇 번이고 경고를 했는데도 말이 안 통하더라고요. 그래서 학생의 스마트 폰을 바닥에 던져버렸어요. 박살이 난 거죠."
이런저런 사연들 속에 그녀는 필리핀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들어왔지만 갈 곳이 없었다고 했다. 때마침 수원의 지인 집이 비어있어서 그곳에 몇 달을 지냈고 다행히도 남편이 전에 다니던 직장에 취직을 해서 천안으로 오게 된 것이다. 몇 해 전엔 셋째를 낳아서 아이들을 키우느라 정신이 없고 둘째가 축구를 잘해서 스포츠 클럽에 보낸다고 했다.
"레슨비가 비싸다고 들었는데..."
라며 정숙이 말끝을 흐리자, 현희는 아들을 축구 선수로 키우고 싶은데 뒷바라지 비용이 만만치 않다고 했다. "두 달 뒤에 제주도에서 열리는 유소년 축구 토너먼트에 아이를 응원할 겸 가족여행을 계획하고 있어요."
워낙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던 그녀는 역시나 대형교회 전도팀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정숙은 그곳에선 시간을 잘 지키냐라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아서 평소엔 마시지도 않는 얼음처럼 차가운 물 한 컵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동그란 불판에 붉은 양념이 잘 배어 있는 뼈 없는 닭갈비가 올라갔다. 양념 사이로 잘잘하게 부서진 손톱처럼 하얀 마늘이 보였고 닭고기 위로 큼직하게 썬 양배추와 흰색에 가까운 굵게 썰은 고구마가 수북이 얹어졌다. 정숙이 먹어본 최고로 맛있는 닭갈비는 춘천 후평동의 식당이다. 그것도 작은 인공폭포 건너편에 있는 닭갈비집이 단연코 최고다. 현숙의 고향이 춘천이기도 하고 J회사 본사가 후평동에서 가까웠기에 본사에 갈 때마다 그 집에서 닭갈비를 자주 먹곤 했다.
그때도 아주 무더운 여름이었을 것이다. 8월 중순이면 말복이 지난 터라 새벽엔 찬바람이 느껴졌다. 전국에서 온 동료들과 함께 일정이 빡빡한 3박 4일간에 콘퍼런스를 마치고 후평동 닭갈비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정숙은 서울에서 저녁에 미팅이 있어서 기차를 탔고 현희는 오랜만에 만난 동기들과 남이섬으로 놀러 간다고 했다. 그렇게 평소처럼 평범한 날이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로 어떤 이유에서 인지 현희는 정숙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정숙에게 거리를 두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짧은 반팔에서 긴 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한 가을이 시작되는 날이었을 것이다. 정숙의 눈을 현희는 애써 피하다가 에둘러 이야기를 꺼냈다.
“원주 지점에 있는 J에게 들은 게 있는데, 정숙 씨 가 H에게 제가 연하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들었어요.”
회의 중에 뜬금없이 이야기를 꺼내는 현희를 기가 막혀서 정숙은 똑바로 응시했다. 단연코 그런 일은 없었다. J가 어떤 의도로 그런 이야기를 현희에게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현희 씨, 저는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없어요. 지금 당장 J에게 전화를 걸어서 확인해 봅시다."
정숙과 H는 대학친구이다. 직장까지 같으니 오래된 관계였다.
"H야, 내가 너에게 현희 씨가 연하를 좋아한다는 말을 했었니? 현희 씨가 네가 J에게 그런 말을 했다고 하더라. 너무 황당해서 정말이지 말이 안 나오네. "
"웬일이야. 지난여름에 춘천에서 콘퍼런스가 있었잖아. 현희 씨가 한참 어린 인턴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고 느꼈던 걸 J에게 지나가는 말로 살짝 말했을 뿐인데, 왜 불똥이 네게 튀었냐. 내가 현희 씨에게 전화해서 설명을 해야겠다."
H는 현희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지만 현희와 정숙의 관계는 점점 서먹서먹해졌다. 본사에서 교육이 있을 때마다 J와 현희가 가깝게 지내는 모습이 정숙의 눈에 들어왔다. 그로 인해 정숙은 끝내 J와 가까워질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렸다. J의 행동은 승승장구하는 현희를 향한 경계심과 질투심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J가 함께 일하는 동료들 사이를 이간질하고 힘들게 한다는 소식이 정숙의 귀에 들어올 때면 ‘그럼, 그렇지!’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정숙은 신혼 초에 수원에서 인천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리고 3개월 후에 현희의 결혼소식을 듣게 된다. 같은 교회에서 만난 청년이랑 결혼을 하는데 나이가 8살 연하라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정숙은 알쏭달쏭한 감정에 실소가 나와버렸지만 그녀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했다.
정숙과 현희가 일하는 지점은 달랐지만 회사에서 주기적으로 있는 교육 때마다 만났다. 그럴 때면 안부를 묻고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러다가 워크숍 때 사회자가 색다른 게임을 진행했다. 상대방에 대한 감정을 거리 두기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몇 번에 걸쳐서 짝을 만들었고 상대방이 자신에게 얼마 큼의 관계인가를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우연찮게 정숙과 현희는 마주치게 된다. 정숙은 현희에게 주저 없이 다가가는 관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리를 둘 필요는 없어서 사이를 좁혀갔다. 점점 정숙이 다가가자 어느 지점에서 현희는 더 이상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현희가 그녀에게 여전히 편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정숙의 마음도 편안하지만은 않았다. 마치 너무 삶아서 뭉그러진 고구마처럼 가슴속에 묵직함이 내려앉았다.
“현희 씨, 결혼생활은 어떠세요?”
“남편이 경제적으로 저보다 훨씬 생각이 깊어서 살림을 잘 이끌어 가요. 얼마 전에 대학원을 졸업했는데 자꾸 공부를 더하고 싶어 하네요.”
직원이 익어가는 닭갈비를 날이 잘 갈린 가위로 싹둑싹둑 먹기 좋게 잘랐다.
"고기가 다 익었네요. 지금 드셔도 됩니다."
예의 바르게 젊은 직원이 말을 하곤 다른 테이블로 자리를 옮겨갔다. 정숙은 고기 한 점을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으면서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현희 씨, 저랑 함께 일 할 때 많이 힘들었죠? 제가 그때는 일에 대한 욕심이 많았고 어린 나이에 지점을 책임지다 보니 저보다 나이 많은 현희 씨에 대한 배려가 없었던 것 같아요. 부족한 저와 함께 일하느라 고생하셨어요. 서운맘 있으셨다면 사과해요.”
현희는 입속에 넣은 닭고기가 뜨거웠던지 손사래를 친다. 마침내 씹던 고기를 삼키곤 그때 일은 기억도 안 난다고 말하면서 큰소리로 웃어넘겼다.
“그래도 저는 미안했어요.”
그날 정숙이 천안에서 먹은 닭갈비는 어떤 맛이었는지 도통 기억이 안 난다. 그러나 정숙과 현숙의 관계는 살얼음이 겹겹히끼어서 얼어버린 유리창에 따사로운 햇살이 비취자, 순식간에 녹아버린 것처럼 편안히 웃을 수 있었다. 그 후로도 정숙이 친정집에 있는 걸 알고 현희는 그녀가 다니는 교회 전도팀 식사모임으로 초대를 했다. 정숙이 케냐에서 살고 있는 것이 그들은 마냥 신기한지 여러 질문을 해왔다.
"근데 정숙 씨와 현희 씨는 어떻게 만난 사이예요?"
얼굴이 보름달처럼 탐스럽고 피부가 봄날에 막 피어난 백합처럼 하얀 젊은 여자분이 물었다.
"많이 궁금하시죠? 저희는 직장 동료였는데 제가 현희 씨를 힘들게 한 상사였어요."
"정숙 씨, 왜 자꾸 그래요."
현희는 숨이 넘어갈 듯이 깔깔거리면서 웃었다.
정숙은 한국에 가면 고향인 천안에 꼭 들린다. 진실한 대화가 오간 그 닭갈비집은 없어진 지 오래되었지만 현희에게 연락하면 그녀는 두 팔 벌리고 정숙에게로 달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