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날 수 있는 용기
아산의 농촌마을에서 살았던 나는, 고등학교를 채 졸업하기 전에 두 눈이 튀어나올 것만 같은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못해 낯선 서울 한복판으로 날아온다. 누가 나를 일부러 서울로 떠민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가 간절히 원하고 원해서 온 곳이다.
서울에는 엄마 쪽으로 사촌 남동생이 살고 있었다. 우리 가족이 꼭대기집에 살았을 때 엄마가 바로 아랫집 호랑이 할머니의 딸과 사촌 남동생을 중매했었는데 그들이 부부로 연을 맺어 화곡동에 살았다. 엄마는 어렵게 사촌동생에게 고명딸인 나를 부탁했을 것이다. 그날 후로 엄마는 외삼촌이 시골에 가기라도 하면 딸을 맡긴 고마움으로 농사진 쌀과 각종 콩종류, 고춧가루, 참깨, 참기름과 제철 과일을 차에 가득 실어서 보내곤 했다. 성격이 좋은 엄마의 사촌동생 댁에서 나는 어름 잡아 6개월쯤 지냈다.
화곡경찰서 건너편에 있던 집에서 출퇴근을 하려면 당산역까지 버스를 타고 나가서 다시 2호선 지하철을 타고 강남역으로 가야 했다. 지상과 지하를 오가는 2호선 지하철은 출퇴근 길엔 지옥행과 다를 바가 없었는데 공익근무원인 청년들이 푸시맨 역할을 할 정도로 서울 사람들에게는 꼭 필요한 대중교통이었다. 프랑크 소시지처럼 기다란 지하철을 타면 칸칸마다 빼곡히 들어찬 사람들로 인해 손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없을 만큼 비좁았다. 사람들끼리 등과 등을 맞대거나 앞과 등이 부딪히면 그 안에서 희하한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은밀한 즐거움을 느끼고 싶은 비겁한 사람들은 아침부터 불거진 바지 앞섬을 여자들의 엉덩이에 비비기도 하고 사이코 패스처럼 명품 옷이나 가방을 잘도 알아채는 이들 중엔 날카로운 칼로 찢기도 하고 가방 속을 귀신같이 뒤져서 지갑만 쏙 빼가는 보이지 않는 손들이 사람들 사이사이를 비집고 다녔다.
나는 어느 날은 숨이 턱 하니 막혀 하차하는 사람들 사이에 떠밀려 나와 교대역 의자에 한참이나 앉아있다가 다음다음에 오는 열차를 탄 적도 있으며 한겨울에 코트나 패딩잠바를 입고 출근하는 날엔 사우나에 들어온 것처럼 후줄근하게 땀을 흘리기도 했다. 이광경을 하늘에서 내려다본다면 마치 기다란 시루 안에서 검은 콩나물이 자라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늦가을이 막 끝나가는 토요일 오후였을 거다. 일명 시골 촌뜨기인 나를 위해 직장 언니들은 퇴근한 후에 명동구경을 시켜준다며 데리고 나갔다. 그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우연찮게 내 눈에 들어온 한 사람이 있었으니 고등학교 친구 H였다. 우린 고등학교 3학년 1 반에서 함께 공부를 했지만 별로 교류가 없었던 사이였는데도 명동 한복판에서 서로를 알아본 게 신기할 뿐이었다. 우린 같은 사투리를 쓰는 충청도 아산에서 올라온 소녀들이었다.
"내 전화번호여. 연락해잉"
"그려, 꼭 연락하자잉"
나와 H는 함께한 일행들로 근무하는 회사 전화번호만을 주고받고 헤어진다.
"너 어디에서 사는겨? 나는 화곡동"
"그려, 나는 상계동 언니집에서 살어"
우린 여러 번의 통화와 만남 끝에 그 애의 회사가 있는 합정역과 내가 다니는 회사인 강남역 중간에 자취방을 얻기로 의견을 모은다. 우린 집값이 저렴하다는 신대방역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2층 집의 한쪽 방을 얻었다. 난곡사거리라는 그곳은 남부순환도로로 이어졌고 오른쪽으론 신림역, 왼쪽으론 대림역으로 가는 방향이었다. 신대방역 부근에는 보라매 공원이 있었다.
우린 그때부터 네플릭스에서 방영된 ‘은중과 상연’처럼 서로를 좋아했으나 때론 시기와 질투가 뒤섞인 우정이 시작된다. 드라마 속에 인물처럼 애틋한 우정으로 맺어진 관계는 아니었지만 청춘이라는 그 이름만으로도 충분하게 아름다웠으며 삶에 대한 경험이 미숙한 아이들이었다.
서울에서 고교 친구인 H와 함께 산다는 것은 참으로 의지가 되기도 했지만 한 공간에서 살아간다는 것 또한 쉽지마는 않았다.
내가 직장을 그만두고 신학교에 가게 되면서 H와 살던 자취방에서 나오게 된다. 그로 인해 그녀와 자연스럽게 거리 두기가 생기는 바람에 서로를 대하는 마음뿐 아니라 각자의 생각을 더깊이 이해하며 수용하게 된다.
방글아
어떤 마음으로 서울로 올라올 생각을 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용기가 갸륵하다. 그나마 네가 정착할 때까지 도움을 주신 친척이 있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이니. 그리고 너에 절친이 된 H.
오빠만 셋인 집에서 자란 너와 언니만 셋이 있던 그 애와 같은 공간에서 1년 6개월이라는 시간을 보내면서 너는 너대로 그 애는 그 애대로 힘든 시간도 있었지만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지금껏 좋은 친구사이로 남아있는 것 같아.
만약 네가 고향에 남아 있었더라면 부모님과 오빠들의 보호와 통제 그리고 사랑이라는 이름 앞에서 독립적인 삶을 살기는 힘들었을 거야. 고향을 떠나온 게 네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아. 물론 지금도 한국과 거리가 아주 먼 아프리카 케냐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말이야.
방글아
너에 미래가 더욱 기대가 된다. 늘 가까이에서 지켜볼게. 사랑한다. 방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