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금없이 신학생이 되다
난곡사거리 버스정류장에서 빠른 걸음으로 1분 거리에 있던 자취방 안마당엔 여름부터 대추 열매가 탐스럽게 열렸다. 그 바로 옆 2층 계단으로 올라가면 전세로 사는 중년부부가 월세를 내준 방에 H와 내가 살았다. 어찌 보면 우리들의 자취방 주인은 아래층에 사시는 할머니가 아닌 희한한 관계로 살아가는 부부였다. 그들은 혼인관계로 맺어진 부부가 아니었고 정부인은 따로 있었다. 거기까진 그렇구나, 했으나 나와 H가 이해가 안 되는 건 시골에서 정부인이 서울에 올라오기라도 하면 같은 방에서 함께 잠을 자고 여자들끼리도 사이가 좋았다.
"형님"
"동상"
서울은 뭐가 달라도 다른가 싶은 것이 어린 나의 눈엔 그런 모습이 고개를 갸웃 뚱거리게 했다.
친구와 자취를 하게 되면서 나는 집에서 가까운 장로 교회를 다녔다. 고향 교회는 성결 교회였는데 서울에는 장로교회 간판이 많았다. 집주인 할머니 소개로 나간 교회는 전교인이 250명쯤 되었는데 공동체에서 주는 유익한 점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한 가지를 꼽는다면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다. 그 사랑의 힘이 내 삶에 큰 영향을 주었다.
내가 교회에 처음 나가게 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여름 방학 때였다. 매번 같은 요일, 같은 시간에 찬송가 차임벨이 동네에 퍼져나갔다. 교회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던 찬송가 반주곡은 농사를 짓는 교인분들에겐 예배시간을 알려주는 알람시계와도 같은 역할을 했고 동네분들 또한 시간에 흐름을 알아채는 소리였다. 그러나 그해 여름, 토요일 저녁은 달랐다. 그 소리는 마치 하나님께서 나를 교회로 부르시는 것만 같았다. 나는 저녁 설거지를 마치곤 교회 집사님께서 엄마에게 선물로 주신 성경책을 가지고 혼자 교회에 가게 된다. 부끄럼쟁이인 내가 어떻게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른다.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나의 손을 이끌고 가는 느낌이라고 할까. 나는 아직도 그날의 그 따스함과 설명이 안 되는 어떤 포근하고 충만함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동네 위쪽에서도 꼭대기에 살던 우리 가족은 동네 중심에 있던 신식집을 사서 이사를 오게 된다. 그 이후로 교회 장로님들과 집사님들은 우리 집이 구원받길 위해서 간절히 기도를 했으나 정작 우리 식구들은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나고 만다. 우리 가족 6명 중에 가장 나이가 어린 내가 교회에 첫 번째로 나가게 된다.
교회를 나간 지 얼마 안 되어 군에서 제대를 하고 서울신대에 막 복학한 전도사님이 학생부기도회를 인도하던 날이었다. 예배당 안 앞에는 큰 나무 십자가가 걸려있었는데 불을 다 끄고 나면 붉은색 전등이 십자가 밑에서 켜졌다. 이날도 교회 전등을 다 끄고 기도를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가 익숙하지 않은 나는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친구들이 나를 전도하려고 했으나 교회를 가지 않았던 것은 교회친구들끼리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는 모습에 이질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속으로 그들을 비웃고 있었다. 교회친구보다는 나라는 존재가 훨씬 더 착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깐 말이다. 그러나 이 또한 다 무너지고 만다.
한 친구가 나의 손을 잡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모태신앙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녔던 사람- 이라던 친구가 알아들을 수없는 말로 그것도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를 시작했다. 나는 그조차 어색해서 계속 눈만 감고 있었다.
'제발, 기도시간이 빨리 끝나라'
'불은 왜 끄고 기도하는겨, 무서워 죽겠네'
'쟤는 도대체 왜 우는겨. 누가 죽기라도 한겨'
'저, 중얼거리는 소린 또 뭐여'
머릿속에선 별의별 생각이 다 떠올랐다.
그런데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아주 어렸을 때 부모님에게 거짓말을 한 것, 엄마 몰래 동전을 가져다가 과자를 사 먹은 것, 나밖에 모르는 악한 모습들이 하나둘씩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그리곤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내가 전혀 의도하지 않은 일이었다.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라는 고백이 나왔다. 그 뜻을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이 일은 나에게 꼭 필요한 증표처럼 특별했다. 그 이후엔 신기하게도 부끄럼을 많이 타던 모습은 사라지고 교회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서울 교회에서는 유아부 선생님으로 봉사하고 성가대에선 알토로, 청년부에선 임원으로 활동을 하는 내내 성경에 대한 궁금증이 커져만 갔다. 그래서 성경 첫 장인 창세기부터 차례대로 읽기 시작했다. 365일 성경 읽기 표를 성경책에 끼워 놓고는 매일매일 정해진 장수를 체크하면서 성경을 일독하게 된다. 처음에는 성경을 읽어도 이해가 안 되어서 좋은 글귀라고 생각되는 부분에만 밑줄을 쳤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성경이 이해가 되니 아주 재미있었다.
직장 퇴근 후에는 교회에 들려 혼자서 기도시간을 가졌다. 그 시간을 통해 은혜와 용서, 회개, 자비라는 것을 몸소 경험하게 된다. 아주 평범한 나의 하루가 새롭게 다가왔다. 매일 기쁨이 넘쳤고 세상이 달라 보였으며 모든 사람들이 아름답게 보였다.
"아이고. 웬 신학교여, 그것도 지지배가"
"고향에 내려와서 농협에나 취직혀. 아브지가 소개해 줄 테니께"
"니는 이제부터 우리 집 호적에서 뺄 거니께, 그리 알어"
내가 신학교에 간다고 했을 때에도 아버지는 반대를 하셨다.
목사가 되려고 신학교에 입학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 바르게 알고 싶어서 시작한 공부였다.
학교를 다니면서 시험에 드는 일도 많았지만 사람에 대한 존귀함과 소중함에 대해서 배웠고 나 또한 그렇게 살려고 부단히 애를 썼다. 주말에는 주일학교에서 파트타임으로 봉사하고 주중에는 M선교회에서 또 다른 공부와 현장 실습으로 바쁘게 지냈다. 신학 4년을 공부한 후에는 M단체에서 전임스테프로 일하게 된다. 물론 월급은 나 스스로가 모금을 하는 시스템이었으니 박봉 그 자체였다. 나의 20대와 30대는 과히 '장작불처럼 활활 타올랐다'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타인 중심적이고 이타적인 삶을 살았다.
내가 20대 초반으로 돌아간다면 신학공부를 하기 전에 먼저 인류학이나 철학을 공부했을 거다. 그렇게 조언을 해준 사람들이 내 곁에 없었다는 게 조금은 아쉽지만 후회는 없다.
방글아
열심히 살아온 너를 위해 열렬한 박수를 보낸다.
어떤 계기로든지 네가 신학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잘한 것 같아. 이 시간 속에서 넌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경험을 통해 소중한 것을 배울 수 있었잖아. 물론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도 있었으나 잘 견디고 잘 이겨냈어. 그런 너를 존경한다.
사랑한다. 방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