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냐 적응기, 하나
2007년 6월 18일, 아침 6시 15분경에 우리 가족 네 명은 이민가방 8개 만을 들고 인천공항에서 출발 그리고 태국을 경유해서 조모케냐타 공항에 도착한다. 우리 부부는 그전에 아프리카 그 어느 나라를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첫째 아이가 탄 유모차는 남편이 몰고 둘째 아이는 엄마인 내 품에 안겨 왔다. 우리 부부는 무모하리 만큼 용감함이라는 무기 하나만을 가지고 아이 둘을 데리고 케냐에 입국한다.
남편은 선교사로 나오기 위해 3년간 신학공부를 하며 교회에서는 전도사로, 선교회에서는 직장인들을 위한 협동간사로 봉사를 하며 목사안수를 받은 후에는 부교역자로 사역하다가 M선교회에서 케냐 선교사로 파송을 받는다. 재정은 생활비와 활동비가 단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비량이었다. 한마디로 우리가 개인적으로 후원금을 모금하면 선교회에서 재정을 한 달에 한번 정산에서 보내주는 식이다. 그렇다고 해서 부족한 금액을 선교회에서 채워주거나 집세와 생활비가 따로 나오는 것도 아니었으니 근근이 한 달을 버텨내야 만 했다.
케냐엔 이미 M선교회에서 파송받아서 사역하는 선배가족이 있었다. 그네들은 케냐에 오기 전부터 힘에 지나도록 선교활동을 했던 부부였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온 가족이 탈진이 온 상태였던 선배는 선교회에 후임을 보내 달라고 SOS를 요청해 왔다.
"운전하다가 정신줄을 놓는 바람에 죽을 고비를 몇 차례 넘겼습니다. 후임을 속히 보내주세요."
우린 선배의 간절한 요청에 응답했다.
선배 가족은 5년 간 적은 후원으로 선교활동뿐 아니라 결코 물가가 싸지 않는 나이로비에서 힘겹게 버텨내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케냐는 치안이 좋지 않은 터라 한국에서 봉사를 하러 온 대학생들을 위한 케어까지 하다 보니 더욱 신경 쓸게 많았을 것이다. 그네들은 첫째 아이가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기다리며 우리 부부에게 사역을 인계했고 2008년 6월에 케냐를 떠난다.
2007년쯤은 케냐 나이로비엔 없는 거 다 빼고 있을 거 다 있는 큰 몰들이 몇 개가 있었다. 그곳에는 나름 괜찮다는 슈퍼마켓이 있었는데 생필품은 유럽이나 UA, 이집트, 미국에서 수입되는 물건이 대부분이었기에 값이 꽤나 비싼 편이었다. 물티슈와 기저귀는 비싸서 쉽사리 손이 가질 않다 보니 물티슈를 사용하기라도 하면 빨아서 재사용하고 둘째 아이가 집에 있을 때는 천기저귀를 사용할 정도였다.
나이로비에는 대부분 인도사람들이 사업체를 운영했고 케냐사람들은 허드레 일을 했다. 서민들은 일할 곳이 거의 없다 보니 젊은 여자들은 외국인 집에서 가정부나 보모로 일하길 원했고 남자들은 경비원이나 정원사 또는 운전사로 일하는 것을 선호한다.
집집마다 창문 안이나 밖에는 안전장치처럼 철창이 있었고 아파트나 일반주택 담위로는 철조망과 전기팬스가 쳐져 있었다.
나의 눈엔 이 모습이 뭔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처럼 이질감이 느껴지는 바람에 늘 마음이 편치 않았다. 치안이 불안한 나라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싶은 것이 긴장감과 함께 종종 큰 한숨이 새어 나오곤 했다.
때론 밤이 되면 현지인들에게 공격을 당하지는 않을까 싶어서 창문을 꼭꼭 잠가야만 하는 현실 앞에 나는, 어떤 무력감이 몰려왔다. 그럼에도 나는 엄마요 아내이기에 아이들을 돌봐야 했고 한국에서조차 한 번도 담가보지 않았던 김치를 만들고 대두를 삶아서 된장에 섞어가며 양을 늘렸야 했으니 선교를 떠나서 생존 자체에 위협감을 느꼈다.
방글아
한국과 완전히 다른 새로운 나라에서 아이를 키우고 적응하느라 고생이 많았어.
고국에 꼭대기집에서 자유롭게 자란 네가, 케냐에서 치안 때문에 외출도 제대로 못하고 집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으니 얼마나 답답하고 힘들었겠니.
그 힘듦에서 너의 최고의 장점인 긍정 마인드로 잘 견뎌 주워서 대견하고 고맙다. 그런 너를 내가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니.
방글아, 수고했어.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