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해는 부쩍 비가 많이 왔다. 낮에도 저녁에도 수시로 비가 내렸다. 앞마당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바나나 나무 잎사귀로 빗물이 미끄러지듯 흘러내렸고 마바티(양철지붕) 위로 비가 쏟아질 때면 집안에서 이야기를 해도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시끄럽다. 양철지붕 위에 쏟아지는 빗소리가 베토벤의 피아노 '운명' 연주곡 같다는 생각이 드니 요란한 비 소리가 정겹기까지 하다. 이제 나도 케냐의 삶을 어느 정도 즐기고 있다는 것이리라.
오후에 빨래를 걷다가 우연히 바나나 나무줄기에서 새로운 꽃이 피어나는 것을 보았다. 바나나 나무를 보면 참 신기하다. 꽃을 피우기 시작하면 큰 꽃잎은 박수를 치듯 활짝 감추었던 자신의 색을 부끄러움 없이 드러낸다. 꽃잎은 적색에 가까운 빨간색인데 노란색의 열매가 맺어지는 반전의 매력이 있다. 바나나 줄기와 잎사귀, 꽃잎까지도 버릴 것이 없을 정도로 케냐에서는 효도 나무다. 이놈은 평생에 열매를 딱 한 번만 맺는다. 열매를 딴 나무에서는 영원히 바나나를 맛볼 수 없다. 그래서 바나나를 수확한 나무는 잘라 내야 한다. 우리 집에서 수확을 마친 바나나 나무는 잎사귀와 함께 앞집 끼꾸유 아저씨 댁에 소여물로 준다. 굵직한몸통을 자르면 끈적끈적한 수액이 뚝뚝 떨어지는데 진액이 묻은 손바닥은 이내 검은색으로 변하곤 한다. 액이 옷에 묻기라도 하면 염색약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고맙게도 열매를 맺고 끝자락에 남겨진 꽃은 진귀하게 사용된다. 예전에 나이로비 외곽 시골에서 10개월 동안 살았을 때 만난 젊은 필리핀 부부가 있었다. 그들에게 배운 바나나 요리가 있는데 꽃잎 부침개다. 먼저는 부드러운 꽃을 삶아 하루쯤 찬물에 담가 쓴 맛을 우려낸다. 꽃과 고기와 여러 야채를 섞어 햄버거 패티를 만들어서기름에 지져내면 쫀득거리는 맛이 버섯과 흡사하다.
바나나가 덜 익었을 때는 바나나 스튜를 해 먹기도 하는데 맛은 마치 폭신폭신하게 삶아 낸 감자 같다. 길거리 좌판에서 아저씨들이 파는바나나는 한 송이를 파는 것이 아니라 한 개씩 잘라 판다. 길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쉽게 간식으로 사 먹을 수 있는 과일이다. 바나나 한 개당 가격은 한화 200원쯤 한다.
어느 때인가 우리 집 앞마당에서 바나나 세 덩이를 동시에 수확한 적이 있다. 한 덩이는 설탕을 듬뿍 넣어 바나나 청을 만들었고 한 덩이는 숙성시켜 식초를 만들었고 한 덩이는 건조기에 말렸다.
마트에서는 보통 노란 색깔의 바나나와 멍키 바나나라고 불리는 작은 바나나와 그린 바나나가 판매되고 있다. 칩스 과자 코너에는 공장에서 나온 기름에 튀겨낸 바나나를 판매하고 있다. 그러나 바나나 꽃은 야채 코너에서 찾아볼 수 없다. 현지인에게 바나나 꽃으로 요리를 하냐고 물어본 적 이 있다. 그는 우린 바나나만 먹는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도 그럴 것이 케냐의 도시나 시골이나 부자나 가난한 사람들의 집에 마당이 있기라도 하면 그곳에는 영락없이 바나나 나무가 서 있다. 마치 신께서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해 마련해 준 특별한 선물인 것처럼 말이다.
바나나 꽃으로 야채전을 만들다
음식이란 준비하는 과정은 손이 참 많이 가지만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한순간이다. 맛의 평가는 입에 들어가자마자 금방 나타나 수고 한만큼 평기가 좋지 않을 때는 참으로 섭섭한 맘은 어쩔 수 없다. 우리 집 효자 나무에 열리는 바나나는 그리 달콤하지는 않지만 자라는 과정에서부터 충분한 기쁨을 준다. 비가 오기라도 하면 잎사귀가 반질반질한 것이 매혹적이기까지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