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내음은 엄마의 향기

타국에서 쑥을 만나다

by Bora

코로나 19 펜데믹으로 집콕 생활이 오래되고 있었다.

세 아이들은 각자의 방에서 온라인 수업 종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삼시 세 끼를 집에서 만 먹는 가족들이었다. 그동안 나름 신경 써서 식사를 준비했지만 이제 슬슬 지쳐가는 시점에 도달한 것 같다. 한국 마켓에 새로운 컨테이너가 입고됐다는 소식을 한인 카톡방에서 발견하고 한걸음 달려가 S라면과 A라면을 박스채 사 왔다. 아이들에게 넉넉한 인심을 베푼 듯 점심은 각자 알아서 입맛에 맞는 음식을 챙겨 먹는 걸로 하자했다. 우리 집에서는 한국 라면은 별미다.

오랜만에 진한 아메리카노 한잔을 들고 정원으로 나와 바나나 나무속을 들여다보니 어느새 새로운 바나나가 익어가고 있었다. 담벼락에 자라는 패션 나무는 잎사귀만 무성하고 한 동안 피었던 꽃들은 고개를 숙이더니 열매조차 열리질 않고 있다. 몇 해 전 친구가 심어 놓고 간 로즈메리 두 그릇가 화초가 아닌 나무처럼 가지가 실하게 자라며 작고 예쁜 보라색 꽃을 피우고 있었다. 로즈메리는 향이 강해서 해충의 피해도 거의 없어 집안의 잡냄새를 잡아주는 방향제로 사용하고 있다.

거실에 꽂아 놓았던 로즈메리가 시들어 버린 지 오래되어서 새로운 가지를 '똑똑' 랐다. 나무 아래쪽 연초록색 로즈메리를 꺾다 보니 눈에 낯익은 식물이 보얐다. 지금까지 내 눈에 잘 띄지 않았던 것은 우기철에 잔디가 쑥쑥 자라서 잡초 사이에 숨겨져 있었든지 아니면 1주일에 한 번 잔디를 깎는 남편이 올라오는 잎을 수시로 잘라서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바삐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가만히 앉아서 보니 한국의 쑥이 올라와 있었다.

7년 전 어느 집 뒤뜰에 갔다가 쑥을 보고 반가워 뿌리를 캐다가 담 너머 밭에 심어 놓았었다. 밭에 축사가 지어지면서 다시 쑥 뿌리 몇 가닥을 수돗가 옆에 심어 놓았는데 어느 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는데 쑥이 어느새 로즈메리 그늘에 자리를 잡고 뿌리를 내렸던 것이다. 쑥의 생명력이 감탄스럽다.


코로나 19 시기에 한국에 사시는 엄마와 예전보다 더 자주 통화를 하게 되었다. 엄마는 070 전화기로 수시로 전화를 걸어왔고 나 또한 한국에 계신 노부모님이 걱정이 되어 안부 자주 물었다. 어느 날은 마가 전화를 안 받으셨다. 알 보고니 아버지와 함께 쑥을 뜯으러 깨끗한 들에 다녀왔다고 하셨다. 해마다 3~4월이면 아픈 다리를 끌고 냉이와 달래와 쑥을 캐러 다니는 엄마가 걱정이 되어서 잔소리를 했다. 하지만 봄이 되면 어김없이 엄마는 비닐봉지 안에 작은 과도와 호미를 넣고 들로 나가신다.

술만 취하시면 이상하게 돌변하는 남편과 육십여 년을 살아온 엄마다. 론 팔순이 훌쩍 넘은 아버지는 좋아하던 술 앞에 무릎을 꿇으신 지 오래되었고 불같은 성격도 진작 꺾이셨다. 논일과 밭일에 엄마의 손가락 마디마디는 굵어졌고 손등마저 쪼글쪼글해졌다. 일 많던 과수원에는 대학교가 오래전에 들어섰고 논도 오래전부터 주공아파트가 생긴다 고된 일은 안 하시지만 몇 해 동안 알타리 공장에서 일하시면서 손주들 용돈을 챙기셨다. 등은 점점 굽어가고 매일 다리가 아프다며 '아이고' 하셔도 일거리 앞에 주저 없이 몸을 사리지 않는 분이시다.

올봄에도 어김없이 들에서 뜯어 온 첫 쑥으로 가깝게 사는 세명의 아들들에게는 쑥개떡을 만들어서 까만색 봉지에 담아 주셨을 것이다. 이제 늙어가는 자식들과 성인이 된 손주들은 좋아하지 않을 쑥개떡을 말이다. 그래도 또다시 내년 봄이 오면 엄마는 꼬부라진 허리를 부여안고 들로 나갈 것이 분명하다.

엄마의 수고로 나는 수시로 쑥개떡을 먹으며 자라왔다. 평소 떡을 좋아하지 않는 나다. 그러나 내가 유일하게 먹는 떡은 예쁘지는 않지만 참기름이 쫘르륵 흐르는 쑥개떡이다.


첫 아이를 낳고 2주는 둘째 오빠네 아파트에서 몸조리를 하고 한 달은 일반 주택인 친정 엄마네에서 지냈었다. 이유인즉 친정집은 화장실이 실내와 분리되어 있어서 아기가 추운 2월 초에 태어났으니 둘째 오빠네 방 한 칸을 나에게 내주었다. 엄마는 오빠 집으로 출퇴근을 하며 나와 갓난아기를 돌보았다. 아기는 잘 먹는 엄마인 내 덕으로 태어나면서 4.35kg을 자랑하듯 자연분만으로 태어났다. 누가 아이를 낳을 때 하늘이 노랗게 변한다고 했던가? 내 기억으로는 하늘은 까만색이었을 뿐 아니라 천둥과 번개까지 쳐댔다. 친정 엄마는 태어난 아기를 보며 한 달은 키워 온 것 같다며 아기의 숱 많은 머리카락이 신기한 듯 쓰담 쓰담하셨다.

34살의 나이에 첫 아이를 출산하고 모유가 안 나와 수시로 유축기 젖을 짜며 울음이 터져 나오고 첫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동안 시큼한 땀냄새가 고통스럽기까지 했다. 갑자기 등짝이 싸늘해지며 머릿속에 바람이 지나가는 것처럼 소름이 끼치기도 하고 손안에 땀이 고이는 것을 보며 '아기를 낳고 몸이 망가지는구나'라는 두려움 느꼈지만 변함없이 봄은 찾아왔다.

친정집은 윗 공기가 시원해서 기분이 상쾌하고 내가 자란 곳이라 마음이 편했다. 친정 엄마는 아기 자랑을 하고 싶은지 교회 목사님과 성도 몇몇 분을 초대해서 감사예배를 하자고 했다. 예배를 마치고 차려오신 간식은 달달한 식혜와 쑥개떡이었다. 떡에 참기름을 발랐는지 윤기가 흐르는 떡은 찰지고 향긋한 내음이 입안 가득 퍼졌다. 엄마의 넉넉한 손은 가시는 손님들 가방에 쑥 봉지를 넣어 주시기까지 했다.

막둥이인 내가 쑥개떡이 먹고 싶다고 말하면 언제든 떡을 만드셨던 엄마다. 그 지혜는 삶아 놓은 쑥과 불려 놓은 맵 쌀을 방앗간에서 갈아 와 한 봉지씩 냉동고에 얼려 두었다. 누군가 쑥개떡이라는 말만 꺼내도 후딱 만들어 내셨던 것이다. 몸조리 중에 친정집에서 자주 먹었던 쑥개떡의 효력 때문이었을까? 나는 둘째를 이어 셋째까지 낳는 체력까지 생겼다.


어느 해보다 올해 친정엄마하고 통화를 자주 한다. 화를 하면서 한국의 계절 변화와 엄마의 일상생활을 가깝게 알게 되었다. 그동안 잊고 지내던 나의 유년기 시절과 엄마의 음식들이 자꾸만 생각이 났다. 엄마가 냉이를 캐왔다고 하는 날은 냉이무침과 냉이 된장국이 먹고 싶었고 달래를 캔 날은 향긋한 달래 간장과 파래김이 생각이 났다. 쑥을 뜯어 온 날 당연히 쑥개떡이 아른거렸다.

한국을 떠나 온 지 해수로 13년을 맞이하고 있다. 어느 노래 가사 중 100세 인생 중 반을 살아가고 있다. 엄마의 음식이 아닌 내 스타일의 음식이 입에 익은 듯 하나 내가 그리워하고 있는 음식은 엄마가 만들어 주셨던 투박한 음식이다. 고추장에 박아 숙성시킨 무장아찌와 묵은지가 들어간 청국장, 국멸치를 넣고 푹 끓인 열무 지짐, 소금물로만 삭힌 고추며 집간장과 고추장으로 버무린 계절 나물들은 아무리 값비싼 음식이 있다 한들 엄마의 음식만큼은 못 했다.

햇빛을 맞으며 쪼그려 앉아 쑥을 뜯었다. 칼보다 편한 가위로 싹둑싹둑 뿌리 위까지 잘랐다. 쑥 향기가 향긋하게 코끝을 간지럽히며 엄마의 향기처럼 내 가슴에 파고들었다. 난생처음 쑥개떡을 만들어 보리라 다짐을 하며 떡집에 쌀가루를 주문했다. 뜯어 놓은 쑥을 한참 다듬다 보니 양 손가락에 검은 물이 들었다. 쑥을 다듬으며 엄마의 향기를 맘껏 들이마셨다. 타국에서 쑥을 대하는 나의 행위는 단지 입을 즐겁게 하는 음식이 아니라 엄마에 대한 그리움 자체였다.

아기를 출산한 엄마들은 모두 안다. 임신 중에 순대가 먹고 싶으면 꼭 순대를 먹어야 다시 먹고 싶은 욕구 안 생기는 것처럼 나 또한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해결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타국 생활에서 고향과 엄마에 대한 그리움은 쑥개떡을 만드는 작은 행위로는 결코 멈출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 끝나지 않을 거룩한 행위를 고산 1,800미터 지대인 나이로비에서 계속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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