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한국에서 오신 의사 부부와 함께 케냐 최대 국립공원인 '마사이 마라'를 다녀온 적이 있다. 가족 중에서 나만 두 번째 방문이었고 남편과 세 아이들 그리고 부부는 처음 마사이 마라를 여행하는 것이었다. 차 뚜껑이 열리는 사파리 차로 6시간 달리는 거리였다. 니므로라는 하이웨이를 한참 오르자 우주에서도 보인다는 리프트 벨리에서 사진을 찍고 나록이라는 곳에서 케냐식 뷔페로 점심을 먹었다. 아직도 마사이 전통복을 좋아하는 마을에는 얇지도 두껍지도 않은 담요 한 장을 상체에서부터 둘러 정강이와 무릎 사이쯤 내려오는 치마처럼 입는 남자들이 보였다. 끝이 안 보이는 마른 초원에는 몇백 마리의 염소 떼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바쁘고 부지런하게 살아가는 한국사람들은 케냐의 광활한 땅을 무척이나 부러워한다. 겉보기에는 비옥한 넓은 땅이 눈앞으로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첫 번째 마사이 마라를방문할 때동행하던70대 어르신이 있었다.
"아니 이 사람들은 넓고 귀한 땅을 왜 놀려. 콩이라도 심어야지! 날씨도 좋은데 농사를 지으면 3모 작은 하겠네."
안타까움의 소리인지, 질책의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내 귀에 거슬렸다.
"케냐에서 비가 오면 축복이라고 해요. 돌이 많고 물이 귀한 땅에 농사를 지으려면 우물부터 파야하는데 돈이 많이 들으니 쉬운 일은 아닐 거예요."
나는 길가에서 산 구운 옥수수를 잘근잘근 씹으며 말을 받아 냈다. 어르신 끝없이 이어지는 땅을 보다 이내 샛 잠을 주무시고 나더니 다시 땅 이야기를 꺼내신다.
"아휴, 놀고 있는 땅 아까워라."
땅, 땅, 땅 그녀에게 땅이란 이토록이나 중요한가 보다.그녀는 여행 중에 그리고 돌아오는 길 내내 땅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나는 '당신이 옳습니다.'라는 대답을 침묵으로 대신했다.
우리가 나록에서 점심을먹자마자 차는 다시 달려 나갔다. 길 어느 지점에서 왼쪽으로 꺾자 본격적으로 마사이 마라 국립공원으로 진입을 시작하게 되었다. 초입부터 족히 1시간은 달려야 '마사이 국립공원'이 나온다. 길은 울퉁불퉁, 뒤뚱뒤뚱, 꼬불꼬불해서 손잡이를 잡지 않으면 출렁이는 차 안에서 금방이라도 꼬꾸라 넘어질 것 같았다. 머리를 창에 붙이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차바퀴 밑으로 얄팍하게 아스팔트가 깔려 있던 흔적이 간간히 보였다. 거의 닳아 없어진 아스팔트 위로 붉은 흙이 도로를 거의 차지하
고 있었다.
사파리 차 안에는 케냐 운전사뿐 아니라 요리사까지 탑승을 했으니 총 9명이었다. 인원이 많아서 그런지 기분상 그나마 차가 덜 흔들리는 것 같았다. 계속 출렁대는 차 안에서 휙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니 얼룩말 떼들이 눈앞에서 한가하게 풀을 뜯고 있었다.
연신 종알거리던세 아이들은 얼룩말을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를 세다가 셈을 포기할 정도로 검은색과 흰색의 가로 줄무늬 떼들을 보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 모두는 자연의 경이로움 앞에 숨이 막혔다.
마사이 마라로 진입하는 도로가에서
남자 의사인 한 선생님은 개인병원 가정의원 원장이셨고 아내인변 선생님은 종합병원에서 마취과 의사로 일하고 있었다. 변 선생님은 이번 케냐 방문은 두 번째였다. 처음 방문 때는 병원 의료팀들과 함께 시골지역으로 의료봉사를 갔었다. 그때는 함께 온 팀들과 단체 행동 수칙을 지켜야 했기에 그녀와 나는 잠시 얼굴만 보고 헤어졌었다. 그때 변 선생님의 손에는 커다란 박스가 들려 있었다. 박스 위에는 '케냐 Mr. Lee'라고 진한 유성매직으로 이름이 쓰여 있었다. 박스 안에는 아이들을 위한 캐릭터 양말과 학용품 그리고 비타민씨와 약품 몇 가지들이 있었고 그 위로 소복하게 한국 과자들이 담겨 있었다. 꼼꼼하게 짐을 싼 그녀의 따스한 마음이 내게 고스란히 다가왔다.
한 선생님은 이번 케냐 방문은 처음이다. 오랜만에 진료실에서 나온 그는 숨통이 트이는지 태곳적 모습인 자연을 카메라 셔터로 연신 눌렀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부부를 알고 있었다. 그 오래전이란 내가 결혼 전이었는데 선교회 큰 행사에서 얼굴만 잠시 뵈었고 결혼 후에는 같은 단체 인천지부에서 5년 동안 선교활동을 했었다. 우리가 케냐에 온 후에도 그에게 여러 의료상담을 했고 우리 가족이 한국을 방문하면 돈을 내고 하는 아이들 예방접종도 무료로 해 주셨다.
오래전부터 부부는 동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 가난한 아이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도 조용히 후원을 하고 있었다. 그러했기에 그가 운영하는 개인병원의 수입은 넉넉할 것이라고 의심치 않았다.
사실 그는 병원 운영에서 나오는 수입만으로는 지속적으로 후원할 수 없었다고 했다. 어느 때는 K 나라에서와 P나라 동시에 학교를 짓는다는 소식을 들으면 후원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한다. 그때마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오래전에 구입한 아파트로 담보대출을받아 후원을 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25년 전부터라니.
변 선생님은 결혼을 하자마 남편의 재정 스타일을 파악하고 종합병원에서 계속 일하는 것을 선택했다고 한다. 남편에게는 경제적인 면을 기대하지 않고 '내가 번 돈으로 아이들 교육은 내가 시킨다. '라는 다짐을 했고 남편과 같은 뜻을 품은 그녀는 남편의 수입에 대해서는 차마 욕심을 낼 수 없었다는 것이다.
서로가 삶의 방식을 인정하며 28년 동안 살아온 부부의 고귀한 뜻 앞에 나는 숙연해졌다.
짧은 설 연휴에 아프리카를 방문한 그들은 결국 현지 동네 어르신들까지 진료를 했다. 현지인들을 위해 한국에서부터 구충제와 비타민씨를 케리어 가득 챙겨 온 부부는이렇게 말했다.
"의사인 우리가 할 수 있는 도리를 한 것뿐입니다."
마사이 마라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6시간 내내 나의 머릿속에 맴돌았던 땅과 건물 그리고 돈이란 부분을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자의든 타의든 수없이 부여되는 소유와 물질에 대해서 말이다.
나는 해지는 들녘을 바라보며 혼잣 말로 중얼거렸다.
"당신들이 선택한 삶이 참으로 멋지고 옳습니다. 당신들께 케냐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말, 그 말에 진심을 담아 고마움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