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끼 식사로 만난 인연(1)

똑똑함의 이면

by Bora

셋째 아이를 케냐에서 임신을 하고 점점 배가 불러올 때쯤이었다. 갑자기 한국 짜장면이 먹고 싶더니 며칠이 지나도 뇌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2009년 구글맵이 없었으니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 한국식당을 찾아갔다. 길 눈이 어두운 남편이 같은 자리를 돌고 돌아 오후 2시가 다 되어 한국식당에 도착을 했다.

넓은 정원 가운데에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그 안에 금붕어가 노릴고 있었고 안채 베란다에 여사장님과 손님인 듯한 사람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정원 담 주변으로는 한국의 원두막과 케냐의 전통 집 모양을 접목시켜 지은 집들이 멋스러웠다. 나는 메뉴판이 오자마자 다른 메뉴를 볼 생각은 안 하고 무조건 짜장면과 짬뽕을 주문했다. 드디어 한국을 떠나온 지 1년 만에 한국음식인 짜장면과 짬뽕을 먹는 다니 눈물이 찔끔 나 올 것 같았다.

아이들은 그네를 타고 예쁜 정원에 장식된 목각으로 만든 키 큰 기린과 다양한 새들을 구경하며 연못 주위로 깔아 놓은 자갈을 밟으며 즐거워했다.

웨이터가 음식 써빙을 시작하자 우리들은 마치 교회 예배당에 온 것처럼 경건하게 음식 테이블 앞으로 갔다. 차려진 밑반찬과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숨을 크게 들여 마시고 면발을 입에 넣는 순간, 면발이 입에 착 붙는 것이 아니라 겉도는 것이었다. 도대체 한국에서 먹었던 면발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잔치 국수 면발도 아니고 칼국수 면도 아니었다. 이 정체모를 면발이 참으로 궁금했다. 맘 잡고 먼길을 달려온 나는 실망감이 앞섰다. 입안에서 굴러 다니는 면을 목구멍으로 넘기려는 순간 나는 알아 채 버렸다. 한국에서 온 면이 아닌 이탈리아에서 온 스파게티였다.


음식 가격은 한국보다 세배쯤이나 비쌌지만 짜장면에 대한 그리움을 해소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물론 음식 따라쟁이인 나는 이날 큰 지혜를 하나 얻게 다. 정말 오랫동안 스파게티 면으로 짜장면, 짬뽕, 쫄면, 콩국수까지 만들어 먹었다. 하물 이탈리아에서 온 수많은 마카로 종류 중에 떡볶이 떡을 닮은 것을 라 매콤한 떡볶이로 만들어 먹었을 정도니 용감한 한국인 주부였다. 이 또한 한국음식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는 방법이었으니 새로운 요리를 시도하는 것은 결코 무모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때는 그랬다. 한국 라면이며 인스턴트 음식들은 한국에서 오는 손님이나 단체 봉사팀이 올 때를 기다려야 먹을 수 있는 귀하면서도 싸게 공수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지금은 나이로비에 한국 마켓이 두 군데나 있지만 한국 마켓이 없었을 때는 한인 어느 집에서 고추장과 된장을 판다는 소리를 귀담아 들어야 만 했다. 대부분 생존 능력이 강한 한국인 주부들은 된장 양을 늘리기 위해 기존에 있던 오래된 된장에 대두 콩을 삶아 소금과 함께 버물려 먹기도 했다.

이런들 저런들 어떠하랴 모든 것이 케냐 생활에 적응하는 것이었기에 힘든 줄 모르고 하루 종일 부엌에서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젊은 여자분이 우리 아이들과 놀아 주고 있었다. 그녀는 신혼인데 아직 아기가 없다며 우리 아이들이 놀고 있는 모습을 사랑스러운 듯 지켜보았다. 신혼부부는 케냐에서 전통 물건을 구입해 한국으로 컨테이너를 보낼 계획이라고 했다. 우리는 우리 소개를 하며 살고 있는 동네를 이야기를 하니 가까운 날에 인근 현지 동네로 주문한 물건을 찾으러 간다며 반가워했다. 나는 여자분에게 내 연락처를 건네주었다.

며칠이 지나고 우리 집에 차 한 대가 들어왔다. 차 안에서 내린 사람은 두 명이 아니라 세명이었다. 한 분은 한국식당에서 사장님과 열심히 이야기를 하셨던 분 같아 보였다. 마른 체형인 그는 오십 대 중반쯤 돼 보였다. 나는 손님들을 위해 점심으로 비빔밥을 준비해 놓았고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함께 늦은 점심을 먹었다. 늘 약속 시간에 착오가 많은 나라이기에 시간 개념도 느슨해지니 기다림 또한 익숙했다.

손님을 위해서 손 많이 가는 비빔밥 준비를 했다. 프라이팬에 양파와 호박 그리고 당근을 볶아 냈다. 양상추와 오이는 채 썰었고 간 소고기에 마늘과 간장, 설탕, 후춧가루를 넣고 자글자글 조렸다. 마지막으로 계란 프라이까지 얹어 놓은 비비밤을 보니 맘이 흡족했다. 임신하면서 고수의 맛에 듬뿍 빠져 따로 준비해 놓기까지 했다. 내가 좋아하는 콩나물은 빠졌지만 새콤달콤한 고추장까지 있으니 식탁은 풍성했다.


신혼부부는 남대문에서 전 세계의 소품을 파는 장사를 하고 있었다. 한국식당 사장님은 새댁의 친정엄마의 친구분이셨고 운전하신 남자분은 신랑 쪽의 매형이라고 한다. 나는 머나먼 땅에 가까운 식구와 지인이 있다는 것이 부럽기만 했다. 신랑 쪽 매형인 곽 선생님은 점심식사 내내 이야기를 술술 꺼내 셨다. 다방 면으로 아는 것이 많으시고 머리가 팍팍 돌아가시니 무슨 비상한 일을 계획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식사를 마치고도 한참 동안 이야기가 끝나질 않자 처남이 자제할 정도였다.

가족 없이 혼자 사업을 하시는 곽 선생님이 안타까운 나는 김치가 필요하시면 언제든 전화하시라며 선뜻 내 연락처를 드렸다. 부부는 한번 더 우리 집에 들렀고 컨테이너에 물건이 채워지자 한국으로 떠났다.

오랜만에 곽 선생님이 우리 집에 오신다는 연락을 받고 배추를 사기 위해 로칼 시장을 갔다. 김치를 담그기 위해서는 반드시 멍키 마켓을 가야지 만 배추를 살 수 있었다. 무는 기회가 좋아야지 만 구입할 수 있었으니 김치 고명으로 보라색 양파와 서양 파라는 닉 그리고 주황색 당근을 채 썰어 넣었다. 케냐에 와서 처음 담아 보는 김치는 맛이 있든 없든 참 고마운 음식이었으니 열심히도 담근다.

지금은 한국 마켓과 한식당에서 언제든 김치를 구입할 수 있지만 2009년에는 김치는 참 귀한 음식이었기에 단연코 선물로도 손색이 없었다.

곽 선생님은 천성적으로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불쌍한 케냐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많이 공급하고 싶다. 허접한 기존 전통 물건을 업그레이드시켜 고품질로 재탄생할획이다. 케냐 정부에 NGO 등록 신청을 했지만 등록 허가를 안 내주고 있다. 케냐 정부는 뒷돈만 요구한다."

우리에게 교육 프로그램이 인쇄된 팸플릿을 보여 주며 열심히도 설명을 해 주었다.

정말 일거리가 없는 케냐 사람들이 기술 교육을 받기에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았다. 케냐 정부는 부정부패가 심해서 외국에서 원조가 들어오는 돈을 목적대로 사용하지 않고 정치인들과 공직자들 손에서 없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니 정작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돈은 뉴스거리만 제공하는데 이용될 뿐이다. 뒷 돈을 요구하는 케냐 정부를 한탄하는 똑똑한 곽 선생님의 꿈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기대 반 호기심 반이 생겼다.

곽 선생님은 내가 챙겨준 배추김치를 갖고 천천히 차를 끌고 우리 집 대문을 나다. 차는 시속 최대 60킬로 밖에 안 나가는 아주 오래된 색 봉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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