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케냐에 적응 중입니다

한국인 아줌마가 봉이 되던 날

by Bora

소풍을 가기로 한 날이었다. 워낙 지각하는 것을 안 좋아하는 나는 H에게 2주 전부터 픽업할 주소와 시간을 알려 주었다. 나는 소풍 갈 모든 짐을 준비해 놓고 그녀의 차를 기다렸다. 그녀의 집에서 오전 8시에 떠난 차는 도착할 기미가 안보였다. 아프리카에 살면서 나름 빨리, 빨리를 내려놨다는 생각은 어디로 갔는지 점점 시간이 늦어지자 마음속에 웅크리고 있던 조급함이 튀어나와 버렸다. H에게 그녀의 운전기사 전화번호를 받아 내어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그의 이름은 존이었다.

"존, 어디쯤 오고 있습니까? 하라카 하라카, 빨리빨리 오세요."

나는 기사에게 주소를 보내주고는 구글 지도를 켜고 오라고 몇 번이나 알려주었지만 그는 내가 사는 동네를 지나쳐 버렸다. 나의 높은 목소리는 내 귀에도 신경질적으로 들렸다. 존은 가던 길을 다시 돌아왔다. 신세를 져야 하는 입장이었기에 나는 욱하는 마음을 다스리며 차에 올랐다.

어쨌건 오늘은 소풍을 가는 날이니 뒷좌석에 앉아있는 아이들과 존에게 츄파춥스 비닐을 벗겨 건네주었다.


차는 새로 뚫린 하이웨이를 쌩쌩 달려 나갔다. 이렇게 부지런히 달려가면 지각은 하지 않겠다는 찰나 다리를 지나 좌회전을 해야 할 길에서 나는 그전에 좌회전이라고 존에게 일렀다. 내 스마트폰 구글맵이 길을 잃어버리자 한 동안 길을 찾느라 혼란스러웠다. 공사하는 길을 돌아 흙길을 지나자 다시 하이웨이를 만났다. 마음에 안도감은 생겼지만 약속시간에 제대로 도착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나의 떨드름한 표정을 존에게 들킨 것 같아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케냐의 인건비는 한국보다 10배에서 12배쯤 싸다. 평범한 현지인들을 말하는 것이다. 공장이라도 많으면 좋으련만 사람은 많은데 일할 곳이 없다. 그나마 외국인이 운영하는 Bata란 신발 공장은 2교대인데 거의 남자들이 일을 하고 한국인과 인도인의 가발 공장은 여직원들이 많다. 사파리 여행으로 유명한 곳이다 보니 호텔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코로나 펜데믹 이후 여행객들이 거의 오질 않자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었다. 취업할 곳은 한정되어 있으니 고등학교를 졸업한 젊은이들은 외국인의 집에서 가정부나 운전기사로 일하고 싶어 한다. 그 이유는 현지인 집보다 월급과 대우가 훨씬 넉넉하기 때문이다. 동양인 집에서 일하고 싶은 사람들도 많은데 중국인과 인도인보다는 한국인의 집을 더 선호한다. 이 또한 월급이 후할 뿐 아니라 한국인들은 친절하고 정이 많기 때문이다. 보편적으로 한국인 집에서 일하는 가정부 한 달 월급은 150,000원 쯤되고 운전기사는 250,000원 정도이다. 생활이 넉넉하다 싶은 집은 청소하는 아줌마와 주방일을 하는 아줌마가 따로따로 2명쯤 되고 전용 기사가 있다. 이런 모습은 동서양을 떠나 현지인 집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그뿐이겠는가. 커다란 일반주택에는 대문을 열어주는 경비원과 가든을 관리하는 정원사가 있다. 이것만 봐도 빈부격차가 심한 케냐이다.

나이로비 대학을 나와서 인턴쉽을 1~2년 하고 난 후 괜찮은 곳에 취업을 하면 월 5십~6십만 원쯤 받는다. 유능한 케냐 젊은이들은 경력을 쌓은 후 외국기업이나 국제 NGO로 이직을 원한다. 물론 월급은 당연히 높고 보험이며 휴가 등 복지가 좋기 때문이다. 오늘 내가 얻어 탄 차의 기사는 H가 고용한 사람이다.


약속시간보다 15분쯤 늦게 도착한 행사장에는 사회자가 멘트를 시작했다. 나는 함께 온 아이들을 챙겨 행사장에 보내고는 기사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앉아 있을 때보다 키가 훨씬 큰 그는 우기철에는 비교적 잘 신지 않는 눈보다 하얀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내 실수로 길을 돌아온 것이 미안해서 존에게 "오늘, 너 참 멋지다."라며 칭찬을 해 주었다. 아침 8시에 H집에서 출발해서 행사장까지 1시간 50분을 운전해 온 그에게 고마운 마음의 표현이기도 했다.

사회자는 환영인사와 함께 오늘 진행할 행사에 대해 설명을 다. 커다란 농장에 심긴 작물은 단비로 풍성히 자라 올랐고 발바닥으로 밟히는 흙과 간간히 부는 바람은 기분 좋은 냄새를 뿜어내고 있었다. 역시, 자연은 아름답고 대지는 영혼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다. 마음이 편안 해 지면서 하루가 기대가 되었다.

소풍을 온 아이들은 고추모와 토마토 모종을 받고 부화된 병아리와 갓 심긴 딸기를 구경했다. 그리곤 양손에 흙을 묻혀가며 신나게 고구마를 캤다. 잔디밭에 돗자리를 깔고 삼삼오오 모여 앉아 점심으로 치킨과 피자를 먹었다. 나는 H기사 존과 J의 기사에게 음료와 간식을 챙겨 다 주었다. 우리는 다시 퀴즈게임과 보물 찾기를 만끽하고는 집으로 향했다.


차에 오르는 순간, 젊은 기사는 무슨 말을 하려는 듯이 입술을 움찔거렸다. 차 시동을 걸으며 그는 스왈리어로 말을 꺼냈다. "무렘보 사나." 스왈리어를 알아듣는 나는 한순간 기분이 언짢았다. 무렘보는 아름답다. 예쁘다는 뜻이다. 난데없이 무슨 말인가. 나는 이상한 상황을 빨리 마무리시키고 싶어서 짧게 "아싼테." 고맙다고 말했다. 기사 나이는 25살쯤 돼 보였다. 나는 이 친구가 동양인 아줌마에게 아름답다는 말을 왜 하는 건지 곰곰이 생각을 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내가 무슨 오해할 만한 행동을 했던가. 젊은 기사가 차 안에서 3시간을 앉아 기다리는 동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도대체 감이 안 왔다. 내가 고작 그에게 친절을 베푼 것은 츄파춥스 한 개와 멋지다는 짧은 말 한디 그리고 피자와 콜라를 챙겨 준 것 밖에는 없었다.

차는 한참을 달리고서야 유턴을 할 수 있었다. 기사는 나에게 은근슬쩍 농을 띄었다.

"당신, 남자 친구가 필요하냐?"

기분이 안 좋은 상태에서 이런 말을 들으니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침착하게 나에게는 남편과 세 아이들이 있고 입에 힘을 주어 선교사다라고까지 말해 주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힐끔거리며 무슨 말을 다시 하려고 입술을 달각거렸다. 그의 얼굴을 주먹으로 한방 갈길 것 같아서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케냐 카랜이라는 지역에서 종종 나이 든 백인 여성과 케냐 젊은 남자가 쇼핑을 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바닷가 지역인 몸바사, 디아니, 말린디, 라무라는 곳에서는 백인 남성과 어린 여자 아이들이 데이트를 하는 모습이 눈에 자주 띈다. 특별히 라무라는 지역에서는 부모들은 딸이 중학생이 되면 돈을 벌어 오라고 하는데 그것은 외국인 남자와 데이트를 하라는 뜻이다. 따뜻한 해안가에는 유럽여행 객들이 많다.

젊은 기사는 어디에선가 외국인 여자를 봉으로 잡으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정보를 들었을 것이다. 기분이 정말 좋지 않았다. 내가 케냐에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나 싶은 생각이 들자 정수리가 뜨거워지면서 나쁜 놈, 미 X놈, 싹수없는 놈... 여러 욕이 튀어나왔다.


때마침 H에게 전화가 왔다. 나는 차분하게 그녀에게 기사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알고는 있으라고. 그녀는 나에게 친절을 베풀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안하다며 사과를 해 왔다. 자신도 조심하겠노라고.

혼자서 욕설을 며칠이나 토해내고 분한 감정이 가라앉자 남편에게 말을 꺼냈다. 남편은 나보다 더 많이 현지인들과 접촉하고 많은 일을 경험 한 사람이다. 어떤 때는 남편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도 안 나올 만큼 냉철하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가슴과 머리가 뜨거운 사람이다. 남편은 아직 화가 풀리지 않은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더니 한마디로 정리를 했다.

"당신이 생각하는 친절의 가치관이 이곳에서는 다를 수 있으니 친절은 남편인 나에게 만 베풀어."

대신 욕이라도 실컷 해 주면 마음이라도 시원할 텐데 남편은 역시 냉혈인간이다.

한국 아줌마의 친절이 봉이 되던 날, 때로는 친절도 독이 될 수 있다는 것과 아직도 케냐에 대해 어리둥절 적응해 가는 내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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