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케냐 삶을 시작할 때쯤 한국에 있는 지인들과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은 국제전화와 이메일뿐이었다. 그쯤 스마트폰은 당연히 없었다. 양가 부모님과 통화를 하려면 이메일도 아닌 국제전화를 사용해야 했고 K단체와의 소통은 이메일로 주고받았다. 전기는 수시로 나가고 인터넷 속도는 워낙 느려서 이메일을 확인하려면 많은 인내심이 필요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한국에 사는 지인들과 소통으로 사용했던 방법은 동물 사진이 인쇄된 엽서에 편지를 쓰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잠시 케냐를 방문한 손님이나 케냐에 사시는 분이 한국을 방문하기라도 하면 빼곡한 글씨가 적힌 엽서를 우체통에 넣어 주십사 부탁을 했다. 맘 좋은 어떤 이는 자기 돈으로 우표를 사서 엽서에 정성껏 붙여 우체통에 넣어 주기까지 했다.
한국 사람들 사이에 페이스북이 한참 시작될 때쯤 주위에 있는 분들이 세계에 흩어져있는 친구들과 연락이 되었다며 신세계가 열린 듯 좋아했다. 누구는 지금 방콕에서 어떻게 지내더라, 대학 선배는 이번에 프랑스로 컨퍼런스를 갔더라, 후배 중 누구와 누구는 결혼을 했더라, 내 친구 누구는 해장국 음식점을 시작했더라 하며 자신의 주위 사람들 소식을 이야기하곤 했다. 반면, 페이스북을 이용하는 사람들 사이에 많은 말거리들이 오가기 시작했다.
우리 가족의 한국 방문은 2년에 1번 때론 3년에 한 번이다. 물론 13년 동안 케냐에 적을 두고 안식년을 두 번이나 한국에서 지낸 바 있다.
내가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K단체 사람들은 나를 붙들고 서로를 헐뜯기 바빴다. K단체 리더십 팀은 후배들 페이스북에 훈계의 글을 올렸고 후배들은 자신의 공간에 무례하게 글을 올리는 선배들을 향해 불평을 쏟아 놓았다. 그뿐 아니라 케냐에서 조차 페북 친구의 뒷말을 하니 ` 페북이 참 불편한 소셜미디어 구나`라는 좋지 않은 선입견이 있었다. 한국 사람들의 좋기도 하고 안 좋은 성향 중 하나는 다른 사람들의 사생활에 지나치게 관심이 많다는 것이다. 그 역효과로 나타나는 현상은 늘 뒷 말이다. 그래서 나는 피곤한 페이스북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나에게는 '카톡'이라는 효도꾼이 있었기에 아직까지는 이것 만으로도 세상과 소통하는 것은 충분했다. 스마트폰이 없는 양가 부모님을 위해서는 한국에서 구입 해온 `070` 인터넷 전화기를 설치했고, 오직 나에게 소셜 미디어라곤 지금은 사람들이 관심조차 없는 카스뿐이다. 누가 읽든 말든 카스에 꾸준히 나의 삶을 정리해서 사진과 함께 올리고는 있었다. 사실, 카스를 계속하게 된 이유는 케냐에서 자라는 세 아이들에게 훗날 추억이 담긴 자료를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찾아온 코로나 19 바이러스로 케냐에서 그리 바쁘지 않게 살아가는 나에게 더욱 한가로운 시간이 주어졌다.
케냐타 우후루 대통령은 4월 7일 모든 비행기 출국과 입국을 정지시키고 식당은 테이크 어웨이 만할 수 있게 했고 통행금지 시간을 저녁 7시로 발표했다.이미 케냐 정부에서는 모든 국. 공립. 사립. 인터내셔널 학교 문을 닫으라고 발표를 했고 아이들은 온라인 수업으로 컴퓨터 앞에서 자리를 떠나지 않게 되었다.
케냐는 동부 아프리카 중심지역이기 때문에 나이로비에는 UN 사무국과 전 세계 대사관이 밀집되어 있다. 또한 국제 NGO와 크고 작은 기업의 지사 그리고 각 종교 단체 본부들이 많다. 그러다 보니 나이로비에서는 외국인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코로나 19 비상사태로 많은 백인들과 외국인들이 특별기를 타고 `쭉쭉`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코로나 사태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감염이 확산되는 시기에도 유럽 사람들이 본국으로 출국하는 이유는 케냐의 열악한 의료시설과 치안 문제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생리를 잘 아는 국제단체와 기업에서는 파견된 사람들에게 미리 일시적인 철수를 권고할 정도이니 말이다.
혼란스러운 시기가 계속되었다.
한인 벼룩시장 카톡에서는 한국 마켓과 식당에서 배달음식 목록을 계속 올렸다. 그동안 소극적이었던 배달업체는 적극적으로 다양한 사업체들과 손을 잡고 생활용품과 식료품 그리고 음식까지 배달사업에 속도를 가했다. 새로운 상업 문화가 케냐에서 시작된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불안한 마음이 지속되자 나는 슈퍼마켓에 배달을 하고 싶은 마음이 발동되었다. 어느 지인은 케냐에 최초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 뉴스를 접하자마자 신설된 앱을 통해 주문을 시작했고 집콕 3주를 넘어가는 기간 동안 한 번도 외출을 하지 않았다 하니 과히 부럽기까지 했다.
밤늦은 시간에 손을 걷어붙이고 스마트폰을 꽉 쥐었다. 앱 사용 방법이 늘 낯설기만 한 나에게 큰 각오가 생긴 것이다. 3주째 외출 한번 안 한 그녀에게 인기가 좋은 앱을 추천받았다. 잽싸게 배달업체 앱을 다운로드를 했다. 그리곤 신속하게 앱에 들어갔다. 그런데 업체에 가입하려면 페이스북 비밀번호를 입력하라는 것이다.(지금, 생각하니 잘못 봤을 수도 있음) 내 눈엔 그것만 유독 꽂혔다. 그러나 페이스북 거부감이 있는 나로서는 '페북에 등록을 해? 말어?' 다시 고민이 됐다. 결국 마음은 결정됐다.
안전하게 먹고살기 위해서라도 페이스 북을 등록해야 한다는 미션까지 생겼다.
첫 번째, 페이스북 앱을 깔고 비밀번호를 만들었다.
두 번째, 워낙 비밀번호를 잘 까먹으니 메모지에 비밀번호를 적어 놓았다.
세 번째, 미리 깔아 놓은 배달 업체에 신속하게 페북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배달 업체에 가입이 되자마자 일식, 중식, 한식, 이태리, 패스트푸드 그 외 많은 음식점뿐 아니라 까르프 마켓 그리고 고기, 야채, 과일 가게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가스 배달업체까지 말이다. 신나게 검색을 한 뒤 설레는 맘으로 우리 집 주소를 입력했다. 로딩이 되는 동안 폰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러나 배달 업체 두 군데에서 온 답은 우리가 사는 곳은 배달 제외지역이라는 것이었다. 인터넷 속도가 느려 오랜 시간 공들여 등록을 했는데 말이다. 너무 허탈했다.
다음날 아침부터 분주하게 페이스북 대문에 사진을 올리고 프로필을 작성했다. 등록은 했으니 뭔가는 남겨야 할 것 같아서 최근 카스에 올린 동일한 내용을 몇 개를 올려놓았다. 갑자기 '띠링'하는 알람 소리와 함께 친구 요청이 왔다. 상대방 이름을 확인하며 또다시 `친구 추가 해? 말어?'를 고민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세상에 이 친구가 여기에 있었네'라며 친구 신청을 빠르게 누르고 있었다.
20년 만에 연락이 닿은 사람이 생겼고 잊혀가던 사람들과도 친구가 되었다.
20대에 만났던 이들은 한국은 물론 프랑스, 독일, 영국, 미국, 캐나다, 호주,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시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알바니아, 모로코, 중국, 대만, 필리핀, 이스라엘, 멕시코, 엘사바로, 챠드, 세네갈, 남아공 등 수많은 나라에서 각각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요즈음은 페북의 인기는 한물가고 많은 사람들이 다른 소셜 미디어나 SNS으로 생활의 영역을 옮겨 간 것 같다. 적당하리 만큼 페북 알림이 울린다. 내가 지레 걱정하던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하물며 '그러 한들 어떠하리오.'라는 배짱까지 생겼다.또한 이 익숙함이 지루할 때쯤 나 또한 다른 새로운 문을 두 드릴 찌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제 페이스북을 시작한 지 고작 3주째다.
코로나 바이러스 시기에 집콕 생활로 발이 묶여 있던 나는 '브런치'에 등록을 해서글을 쓰기 시작했고 늦깎이로 '페북' 활동을 시작했다.
길어지는 집콕 생활에도 하루를 거뜬히 그것도 재미있게 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또 하나의 재미는 남편이 모르는 완벽한 비밀이 두 개씩이나 생겼으니 참말로 짜릿한 생각까지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