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랏빛 꽃잎이 살랑살랑춤을 추듯이 땅바닥에내려앉는다. 10미터가족히 넘는자카란다 나무아래에서 올망졸망한 아이들이 꽃잎 위로 폴짝거리며 뛰어든다.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교실 안으로 들어서는 아이들의모습이사랑스러운 토요일 아침이다.
적도가 지나가는곳, 아프리카 케냐에서나는토요일이면한쪽 어깨에는교사용검은가방을둘러메고 다른손에는커다란쇼핑백을 들고한글학교로 향한다. 어느덧, 한글학교에서 교사로 봉사한 지 8년째가 되어간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마음은 아이들을 향한 사랑이다. 그 사랑의 힘이 아니었다면 1년의 30주간을 오롯이 한글학교에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한글학교에 등록을 하자마자 교장선생님께 전화가 걸려왔다.
“한글학교에 아이들을 세 명이나보내시니 엄마가 교사로 봉사를 하면 좋겠습니다.”
한글학교 개학식 날에는 부담감 반, 호기심반으로 참석을 했다. 작은 마당에 40여 명이 넘는 아이들이 다닥다닥 모여서 조잘거리는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한 해는보조교사로 5∼6세 반 아이들이 수업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했다. 수업 중에화장실을 가고 싶거나 손을 씻고 싶은 아이들이나 때론 엄마와 헤어지기 싫어서 우는 아이들을 달래 주었다. 쉬는 시간에는 모래가 가득한 놀이터에서 아이들의 신발과 양말을 일일이벗겨주고 신겨주었다. 혹시나 아이들이 위험에 처하지 않을까 살피기도 했다.
몸상태가 별로좋지 않은토요일이었다. 놀이터그늘에 앉아서 모래놀이를 하는 형제를 바라보았다. 아이들은 모래로 컵케익을 만들더니 그 위에토핑으로 작은 돌을 얹었다.한 아이가 내 얼굴을살피면서손을 내밀었다.
“선생님, 컵케익 드시고 힘내세요.”
나는모래컵케익을맛있게 먹는 시늉을했다. 아이들은 나에게모래컵케익을계속만들어갖다 주었다.
“선생님이컵케익을너무많이먹었더니배가불러서 더 이상은못 먹겠네.”
아이들은내말에신이 나서박수를치며 좋아했다. 한순간마음이 따스해지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그렇게 나는 점점 아이들의 사랑스러움에 빠져들었다.
2014년 한글학교는 빈야드 스쿨이라는 현지인 학교를 빌려서 수업을 했다. 물이 귀한 나라이다 보니 토요일마다화장실과 수도가 말썽을 일으키곤 했다. 해가 들지 않는 교실은 곰팡이냄새가심하게났고아이들이 비탈진 마당에서 뛰어놀다가넘어지기라도 하면 무릎이 깨지곤 했다. 그런데도 아이들은한글학교에 오는 것을 좋아했다.그렇게 1년이라는 시간이후딱지나갔다.
새해가 시작되면서 나는 1학년 아이들의담임을 맡게 된다. 앞니와 아랫니가 빠진 귀여운 아이들이었다. 6명의아이들은 아프리카에서 태어났거나 영유아 시절을 보내고 유년기가 되었다. 1학년 아이들 중에는나의 막내딸도 있었다.
한글학교 수업은한국의 초등학교에서 사용되는국어책과 국어활동으로공부를 한다. 아이들에게 숙제로 그림일기와 책 읽기와 글씨 쓰기 숙제를내주었다. 한 번은그림일기를 써오는 데로스티커를 주겠다고 하자한학생은 1주일 내내 일기를 써오기도 했다.유난히 반 친구들과 사이가좋았던 아이들은출석률도 좋았다. 거의 1년 동안 6명의 아이들은 아플 때가 아니면 결석을 한 적이 없었다. 이 아이들은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 한글학교를 졸업해서 중학생이 되었다.
어느 해는 케냐 정부에서한글학교교사들에게워크퍼밋을요구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신변에 위험을 느낀 교사들은대사님의 배려로한 학기 동안수업을관저에서 했다. 실내주차장에 임시로 사무실을만들고아이들은 관저 1층 베란다와 빈방에서 공부를하다가6개월 후에 나이로비 외곽에 있는 WNS라는 국제학교로 이사를 간다. 우리 집에서 학교까지는 고속도로로 40분쯤이나 걸렸다. 그곳으로 1년 동안 이웃에 사는 한국인 남매를 데리고 다닌 적이 있다. 오빠를 따라 한글학교에 다니고 싶은 4살의 아이를 나의 무릎에 앉고 갈 때면 많은 질문이 쏟아졌다. 그 조그마 난 입에서 쉴 새 없이 쏟아진 언어는 천사의 말처럼 들렸고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는 침을 흘리면서 낮잠을 자기도 했으나 이 또한 사랑스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5살과 6살 유아반의 교사였을 때는 특별활동시간에 한참 유행하던 상어 댄스를 함께 추기도 하고 동요를 부르기도 하고 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여러 활동을 했다. 이시간은여전히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