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데 갑작스럽게 폰이 울린다.
화면에 뜬 이름은 낯이 익었지만
H의 존재는 기억 속에서 잊힌 지 오래다.
전화를 받을까 말까 갈등하면서 의아한 생각으로
통화버튼을 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렸다.
최근에 우연찮은 자리에서 그는 뱀처럼
가늘게 뜬 눈으로 나의 의견을 무시하며
본인이 하고 싶은 이야기만을 거침없이 내뱉었다.
오래전에 H로부터 악행을
경험한 터라 그에 대한 신뢰가 없다.
남에게 손해를 준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채 당당하게 살아가는 그의 모습.
그 무례함과 뻔뻔함을 마주 대하고 있으려니
내 평화로운 마음속이 숙취 끝처럼 울렁거린다.
부처님처럼 온화한 미소의 목소리로 H가
자신의 다듬어지지 않은 말을 사과한다.
이 또한 마음을 얻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자신이 이루고 싶은 목적이 있었기에
전화를 걸러온 것이다.
몇 마디의 대화로 그의 본심을 알아채자마자
마음속의 온기는 싸늘하게 식어만 간다.
그의 말투는 점점 여우처럼 부드러웠지만
나의 이성은 점점 냉철해졌다.
결국 H는 원하는 바를 얻어내지 못했다.
참으로 거리를 두고 싶은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