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12. 8 콧 끝이 차가운 초겨울
눈 쌓인 산자락 밑 흙집, 초가지붕 안방에서
위로 오빠 셋을 둔 막둥이 딸이 태어나다.
개구쟁이 오빠들 반가워서 소리치며 웃다.
1979. 4 어느 봄날
집 둘레 산과 들에 진달래, 개나리, 매화, 복
숭아, 노란 민들레 꽃 흐트러지게 피다.
알록달록 꽃 나라에서 볼 빨간 어린아이 행
복한 미소를 짓다.
1982. 1 추운 겨울날
마당 한가득 하얀 눈 소복이 쌓이고
외양간 어미소 입김 날기며 울고
처마 끝 고드름 주렁주렁 열린 날
가마솥 가득 채운 따뜻한 물로
가슴 봉긋 나온 소녀, 큰 고무 대야 안에서 목
욕을 하다.
1983. 3 아지랑이 모락모락 올라오던 어느 날
외진 산자락 밑에 살던 어린 소녀 동네 한
가운데로 이사를 오다.
사방팔방 집들이 모여 있고 오토바이, 차,
싸우는 소리 뒤 섞여 마음의 고요함을 잃
다.
수줍음 많은 소녀 산과 들을 자유롭게 노닐
던 그때를 그리워하다.
1989. 7 여상 졸업을 앞두고 고향과 먼 서울로 취
업을 하다.
엄마 품을 좋아하던 아이 홀로서기를 서
다.
떠나는 날 엄마는 눈물을 흘리시고 아버지
담배를 피우시다.
1989. 8 화곡동에서 버스를 타고 당산으로, 당산
에서 전철을 타고 강남으로 출근을 하다.
바쁘게 브라운 18층 빌딩 회전문을 밀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11층에 내린다,
회색과 흰색의 유니폼을 입고 컴퓨터 앞
에 앉다.
시도 때도 없이 막내 미스 리를 부르신다.
대리님, 과장님, 차장님, 부장님의 부탁에
설탕과 프림을 넣은 달달한 커피를 만
든다.
앞 쪽 전산실에 일하던 눈이 깊으셨던 그분,
나를 보고 미소를 짓는다.
1991. 9 2년 동안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다.
아이를 인터뷰하던 과장님, 차장님으로
진급을 하셨고 퇴사하는 나를 보며 아쉬
워 하신다.
순박한 아이를 보며 가만히 웃음 짓던 그
분 슬픈 미소를 짓는다.
이젠 강남 길 안녕~~~~
1992. 3 낮에는 유치원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간
대학생이 되다.
긴 머리 바글바글 볶고 생전 처음으로 긴
치마 입어 보다.
낯선 내 모습이다.
1993. 3 몸과 마음이 지쳐 주간으로 학교를 옮
기다.
산 밑 기숙사 안에서 슬피 우는 아이, 아침
저녁으로 눈물이 계속 쏟아진다.
1993. 8 태양이 뜨거웠던 여름
타국에서 봄바람처럼 부드럽고 감꽃처럼
향긋한 사람을 만나다.
아이는 그를 천사라고 불렀다.
1999. 아이를 오랫동안 슬프게 했던 사람 꿈에
나타나다. 용서하기로 하다.
2001.11 마음 따스하고 평온한 사람과 결혼하
다.
아이는 그를 ‘온화, 차분, 변함없음’이라고
불렀다.
2005. 2 세상에서 제일 잘 생긴 아이를 낳다.
마음이 풍요롭다.
자꾸 웃음이 나온다.
봄바람 살랑살랑 내 뺨을 스치고, 감꽃 향기
가 코끝을 스친다.
2007. 2 세상에서 제일 예쁜 아이를 낳다.
똘망한 두 눈과 앙증맞은 손과 발이 사랑스
덥다.
2007. 6 검은색 이민가방 8개
큰 아이 유모차에 태우고 둘째 아기 아이의
품에 앉고 비행기에 오르다.
2008.11 세상에 제일 사랑스러운 아이를 낳다.
케냐 가톨릭 보건소에서 아이가 아이를 낳
다.
미안함과 애틋한 미소를 짓는 남편 어깨가
무거워 보인다.
2011. 6 케냐를 떠나기 싫은 아이, 떠나고 싶은
남편
마지막 남은 짝 잃은 젓가락까지 사가는 인
도 상인, 고맙기까지 하다.
검정 이민 가방 1개 안에, 남은 7개 가방 겹
겹이 포개 넣는다.
2012. 6 케냐로 다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딸
아이 묻는다.
“엄마, 왜 울어?” 아이 대답한다. “응, 좋
아서”
딸아이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
본다.
2017. 6 제주도 바닷바람이 싣고 온 비릿한 냄새
와 습한 기운이 마음을 무겁게 한다.
소낙비 내리는 어느 날 딸아이 묻는다.
“엄마, 케냐 냄새가 그립다”
아이 대답한다. “나도”
소낚비가 지나 간 자리, 흙 내음 대신 비릿
한 바다 냄새나다.
2018.1 아이와 가족들 다시 케냐 땅을 밟다.
2019. 1 쉼 없이 집에 방문하는 손님들로 아이
들 힘에 겨워하다.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이 집이 집이 아
니라 한다.
아이 마음이 복잡하다.
2019.10 책 읽기를 좋아하던 아이, 글을 써보기
로 하다.
복잡했던 것들이 조금씩 정리되어 간다.
2020. 3 코로나 19 팬데믹으로 소중한 일상이
멈추다.
하루 이틀에 걸쳐 브런치에 글을 부지런히
올리다.
2020. 7 갑자기 글쓰기를 멈추다.
무엇을 말하고 쓰고 싶은지 자신에게
묻다.
2020. 8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려고 몸부림치다.
이내 컴퓨터 앞에 앉았다.
2021. 8 한국 방문 중에 가족과 지인들에게 환대를 받다.
2021.11 제23회 재외동포 문학상, 소설 부분에서 우수상
을 받다.
2022. 1 글쓰기 계속하다. 브런치에 매주 2~3회 글을
올리고 수필 공모전에 응모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