숱 많은 쇼트커트에 희끗한 머리카락이 반쯤 섞인 중년의 여인이 빨간색 신호등 앞에서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다. 곧바로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자 그녀의 발걸음이 바빠진다. 길을 건너자마자 인도에서 카페로 올라오는 계단은 5칸밖에 안 된다. 신호등 앞에 서있던 중년의 여인이 금세 카페 안으로 들어선다. 그녀는 동그란 눈을 한번 깜빡거리며 해가 잘 드는 환한 창가에 앉아 있는 귀밑까지 내려온 깔끔한 단발머리의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혜미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은 여인의 얼굴을 꼼꼼히 살폈다. 곱게 화장을 한 얼굴은 잡티를 가리기 위해서 한참이나 공을 들였을 것이다. 블라우스 소매를 위로 살짝 접은 팔목에 드러난 검은 반점들이 눈에 띄었다. 그녀가 뜨겁고 건조한 나라에서 살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혜미는 카페의 통유리 너머로 여인을 지켜보고 있었다. 초록색 가로수 사이로 초가을 햇살을 맘껏 느끼며 걸어오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오는 소녀처럼 설레어 보였다. 이 여인은 혜미가 그토록 간절히 만나고 싶었던 브런치 작가 Habari님이다.
혜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보육원에서 나와서 홀로 생활했다. 그녀는 한동안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방황을 했다. 세상에서 혼자라는 혹독한 현실 앞에서 외로움은 마음의 병을 만들었다. 그놈은 얼마나 지독한지 혜미의 삶에 대한 의욕을 하루하루 갉아먹었다. 삶과 죽음의 끝자락에서 혜미는 우연찮게 브런치 앱을 알게 되었다. 여러 편의 글을 읽다가 ‘Habari’라는 작가에 글을 읽게 된다. 그녀는 아프리카 케냐에 살면서 ‘100일 감사일기’를 연재하고 있었다. 혜미는‘벌금 2백만 원’과 ‘밑반찬 만 14가지’라는 에세이를 읽으면서 아프리카에 서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Habari 작가의 삶이 궁금해졌다. 하룻만에 그녀가 브런치에 올려놓은 585편의 글을 전부 읽어 버리게 된 것이다. 어쩌면 혜미는 Habari 님의 글 속에서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친모에 대한 그리움을 찾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혜미는 용기를 내어서 Habari님의 글에 댓글을 달기 시작했고 메일주소를 알려 준 그녀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10년 만에 스왈리어로 안녕하세요.라는 뜻을 가진 Habari님을 서울의 한 카페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혜미보다 나이가 두 배나 많은 Habari님은 글 속에서 금방 나온 사람처럼 열정이 넘쳤다. 그녀는 카푸치노 한 모금을 마시고는 수줍어하는 혜미를 위해서 어제 만난 사람처럼 편안하게 대화를 이끌어 갔다. 아메리카노가 담겨 있는 투명한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쥔 혜미는 알 수 없는 감정에 목이 메었다.
Habari님과 혜미는 한 달에 2번의 만남을 갖었다. 책 한 권을 읽고 서로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적어도 A4 한 장 이상에 써온 글을 소리 내어서 읽었다. 혜미는 보육원 출신의 친구들과 동생들을 글모임에 초대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 모임에서 그토록 원망하고 미워했던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분, 아마도 대한민국 그 어디에서 살아가고 있을 부모를 용서하게 되었고 DNA가 같은 원가족을 더 이상 갈망하지 않게 되었다. 피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사람들일지라도 가치관과 마음이 통하면 가족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1달에 2번의 주기적인 만남 속에서 함께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책과 글 그리고 자신의 속 깊은 마음을 이야기하면서 영혼을 살찌울 수 있었다.
Habari가 혜미를 만난 지도 벌써 1년이 다가온다. 그녀가 아프리카 케냐를 떠나 온 지 벌써 1년이 지났다는 것이다. 케냐에서도 독서토론과 글쓰기 모임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여기에서 여전히 책과 글쓰기를 사랑한다. 무엇보다도 의미가 있는 것은 젊은이들과 함께 글모임에서 소통하고 공명의 시간을 보내고 있기에 그녀의 중년의 삶이 풍요롭다. Habari는 곧 출간할 책의 마지막 퇴고를 앞두고 있다. 그녀는 노트북 앞에 앉아서 깜빡거리는 커서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자판 위로 살짝 손을 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