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필락시스 쇼크가 왔어요
안동을 지나 중앙고속도로 진입 전 사과농가들이 노점에서 사과를 팔고 있다. 평상시 즐겨 먹는 과일이기도 하고, 요즘 사과생각이 났던 찰나여서인지 차를 세웠다.
"깎아서 맛보세요! 아직도 식감이 좋아요"
아주머니의 상냥함에 무장을 해제하고 그저 맛을 보는데 집중을 하고야 말았다.
식감도 육질도 당도도 좋았다. 쌓아두면 썩혀버리니 만원 어치만 사서 서둘러 길을 나섰다.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머리가 터질 듯 따끔거렸고 온몸에 퍼진 붉은 두드러기는 혼을 쏙 빼놓을 만큼 미치도록 가려웠다. 사실 음식에 예민한지라 어릴 적부터 인스턴트식품은 못 먹고 자랐다. 그 흔한 소시지반찬 한 번을 못 먹고 학창 시절을 보냈으면 그만하면 알만하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운동장 조회를 하면 의식을 잃고 실신을 하던 것에서 시작해 대학에 가서도 1년에 한 번은 꼭 눈을 뜨면 응급실이었다. 기억도 없었다. 의사들은 그저 신경을 많이 써서 스트레스가 많아서 그렇다고만 했다. 그렇게 스무 해 가까이 해마다 기억조차 나지 않는 응급실 행을 겪으며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러니 가까운 지인들에겐 나의 병력과 응급조치요령, 먹는 약을 꼼꼼히 일러두는 것도 하나의 일이었다. 서른이 되던 해 우연히 심정지를 발견한 의사가 부정맥을 의심했고, 결국 부정맥 진단을 받아 2년 가까이 치료를 받았다. 다행히 그 해 이후엔 의식을 잃고 응급실에서 눈을 뜨는 일은 없었다. 천만다행이었다.
실신할 때, 즉 블랙아웃(black out)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생과 사를 오가듯 그 숨 막히는 고통과 찰나이지만 기억은 나지 않고 눈을 떠보면 전혀 다른 곳에 있는 느낌 말이다. 죽음의 고통이 어떠한지 어찌 알겠는가마는 살아있는 상태에서 온몸으로 세포들이 겪으니 그 강렬함과 두려움이 스스로 말해준다. 호흡을 마감하는 순간이 어떠할지를 말이다.
블랙아웃까지는 아니지만 오늘은 아나필락시스 쇼크와 블랙아웃이 동시에 온 날이었다. 사과 한 조각에 말이다. 안구가 빨갛게 충혈되고 뇌는 터질 것만 같았다. 호흡곤란에 식은땀, 그리고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이미 고속도로 남안동 IC를 지나 의성휴게소까지는 16km가 남은 상태다. 휴게소까지는 무리였다. 서둘러 보이는 갓길에 주차를 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요...."
잠시 후 119 소방대가 도착했고, 나는 응급실로 안전하게 후송되었다.
"환자분! 제 말 들리세요? 퇴원하시고 꼭 대학병원 알레르기내과에 가서 알레르기 원인을 반드시 찾아야 합니다. 안 그러면 정말 사달 납니다. 환자분은 매우 고위험군이에요!"
(안 찾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못 찾았어요. 제발 찾아주세요.... 나의 서글픈 독백이다)
항히스타민제와 에피네프린 처치를 받고 지인의 도움을 받아 다시 봉화 춘양으로 돌아왔다. 도시에서 살 팔자는 못 되려나... 집에도 못 가고 다시 백이다. 기도가 붓고 고막은 터질 듯 멍하고 호흡곤란에 실신이 겸해지는 이런 알레르기 증상은 지난 과거에는 없었다. 최근 1년 새 벌써 네 번째이니 뭐가 문제인가 싶어 생각이 깊어진다.
사과라고 다 같은 사과는 아니다. 어떤 사과는 아무 이상이 없었으니 말이다. 각종 환경호르몬과 보존제, 그리고 오염 때문인 것일까? 음식알레르기가 심하니 음식을 상당히 조심하는 편이다. 그 흔한 직장회식조차도 피하는 편이다. 인스턴트나 식당음식은 거의 입에 대지를 않는다. MSG는 기본이고 가공식품도 마찬가지다. 남들처럼 가공식품도 먹고 외식도 편하게 하고 싶은데 참... 불편할 때가 많다. 겉은 싱싱한 때깔 좋은 야채라도 먹고 나면 가려워 미칠 것 같으니.... 속을 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람도 그렇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성현들의 말씀이 참 맞다. 때론 수십 년을 알고 살아도 모를 때가 있는 것이 사람이다. 내 마음도 내가 모르는데 당연지사 아니겠는가. 가까울수록 신뢰할수록 사랑이 깊을수록 작은 말 한마디에, 행동에 쇼크를 받고 때론 배신감에 극단적 행동도 한다. 그것이 곧 사람이 만들어낸 인간 아나필락시스 쇼크는 아닐까? 아나필락시스는 심하면 사망에도 이르고 후유증도 있다. 내 경우엔 일주일 정도는 호흡이 편안하지가 않고 머리가 많이 무겁고 어지러웠다. 1년 새 네 번이나 겪고 나니 이것저것 생각이 깊어진다.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본능적으로 의미를 부여하거나 찾아보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 아닐까? 응급실에 실려간 덕택에 주말은 공기 맑은 봉화 춘양에서 또 홀로 보내야 한다. 가족들이 보고 싶지만... 그래도 움직이지 않고 안정을 취하는 것이 좋으니 말이다.
대신 밤이 깊어가는 이 시간, 브런치를 해 본다.
SNS도 안 할 만큼 사적인 이야기들을 풀어내지 않는 나인데... 글쓰기가 좋긴 하나보다. 시작하기를 주저해서 그럴 뿐 막상 써보니 왜 진즉에 안 했나 싶다. 처음에는 누군가에게 보이는 것에 의식이 되었다면 이제는 굳이 그럴 필요도 없는 듯하다. 왜냐고? 가린다고 가려질까? 그 사람이 쓰는 문장이든 워딩이든 그리고 어법이든... 어디에 선가는 분명코 글쓴이의 향기가 묻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쓰기로 했다.
독자에 대한 예의가 없는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그저 이 글들은 나의 독백으로 남겨놓으려 한다.
음식으로 인한 아나필락시스든 사람으로 인한 쇼크든 겪지 말아야 할 일이지만, 적어도 내가 그리고 우리 자신이 원인제공자는 되지 말아야 한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음식에 대한 트라우마가 아직까지는 크지 않다는 것이고, 사람에 대한 트라우마도 그렇게 없다는 것이다.
춘양에 가족이라곤 이곳에 없지만, 가까이 사는 이웃이자 지인이 서둘러 응급실까지 와 주어 고마울 뿐이다. 119에서는 지인이든 가족이든 인계를 해야 후속조치의 마감인가 보다. 혼자 조용히 처리하고 싶었는데... 역시 사람은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덕택에 내가 살아서 이렇게 몇 자 적고 이런 나의 독백을 나눌 수 있으니 말이다. 감사한 밤이다.
이 글을 읽는 님들도 생각의 디톡스를 하면서 가뿐한 3월의 첫 주말을 보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