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탄 소년단에 빠져있는 큰아이는 내게 매일 그들의 사진을 보여주는데 주로 물어오는 것은 " 엄마 누가 제일 잘 생겼어요? " 나, " 이 사진 너무 멋있게 나오지 않았어요? " 다.
차라리 두 번째 질문이라면 대답해주기가 쉬운데, 첫 번째 질문은 참 난감하다. 누가 제일 잘 생겼다고 느끼는 나의 마음이 중요한 일은 아닐 텐데 자꾸만 물어온다. 그 대답이 어려운 이유는 내게 사람의 외모란 그냥 외모일 뿐 매력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외모가 뛰어나다 함은 그저 멋진 옷을 입었구나라는 느낌일 뿐이고 그것보다는 어떤 사람만이 가진 고유한 매력에 더 눈길이 간다.
방탄소년단을 사랑하는 모든 분들께 죄송한 말씀이지만 아이가 누가 제일 잘생겼냐고 물어볼 때 나는 늘 쌍둥이들이냐고 묻는다. 내가 보기엔 어른들 말마따나 "갸가 갸여?"인 것이다.
방탄이라면 눈에 불을 켜는 아이에게 대체 그 가수가 왜 좋으냐고 물어본 건 나였다. 이에 아이의 대답은 명쾌했다.
" 그냥 좋아요. 좋은데 이유가 어딨어요~ "
잊고 있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데는 이유가 없다는 걸. 사랑은 아무런 조건도 이유도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오랜 시간 잊고 살아온 것 같았다. 나는 왜 그 간단명료한 진리를 잊고 살아왔을까.
알아요.
저는 어른이 되었고, 이젠 그들이 내게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걸.
그렇지만 아직도 그들이 저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것을 느낄 때면
무척 화가 나고 숨이 막혀요.
제가 엄마 보호자의 역할을 잘 해내지 못하면
그들에게 응징을 당할 것만 같습니다
저의 깊숙한 마음속을
그들로부터 지배당하고 있다는 것이
몹시 화가 납니다.
안전하게 자라고 싶었던 간절한 소망은 결코 채워지지 않았다. 언제나 위축되어 있었고 사소한 일들로도 혼이 났다. 그래서 잘해야만 했다. 모든 걸 혼자서 잘 해내지 않으면 언제 버림받을지 알 수 없는 나날이 반복되었다.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다. 미숙하기도 하고 실수하기도 했다. 스스로의 미숙함과 실수를 질책했다.
‘ 너, 실수한 거야, 어쩔래? 엄마가 너 때문에 힘들어졌어. 이제 엄마도 아빠처럼 사라져 버릴걸? 넌 혼자 남겨지던가, 삼촌들이나 이모한테 맞게 될 걸, 각오해야 될 거야. ’
늘 긴장의 상태, 상대방의 표정을 살피는 상태, 상대방이 내게 호의적인지 아닌지를 가늠하고자 하는 상태, 이 자리가 이 공간이 내가 편히 있어도 될 곳인지 고민하는 상태가 이어졌다. 그러면서 나의 감각은 민감하게 발달되어갔고, 건강은 나빠졌다.
허약해서 자주 아팠고 여기저기 이사를 다닌 탓에 전학을 여러 번 가면서 말수가 줄었다.
그 덕분인지 나는 지금도 상대방의 감정을 잘 느낀다. 말로 표현되지 않는 감정들을 민감하게 읽어내는 덕분에 지인이나 친구들 사이의 상담가가 되었다. 내 문제도 해결을 못 하면서 타인의 고민을 상담해준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지지만 어쨌든 이런 내가 타인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는 것은 참 다행이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이 나의 이런 점에도 밝음과 어둠이 공존한다.
‘타인의 감정에 민감하다’는 것은 자칫하면 자기 자신의 소외로 이어지기도 하며, 관점을 외부에 둔 채 상황에 끌려가게 되기도 한다. 때로는 지나치게 타인을 배려하느라 힘들어질 때도 있고, 손해를 감수해야 할 때도 있었다. 타인의 감정에 민감하기 때문에 타인의 감정에 거리를 두지 못하고 나 스스로가 그 감정에 젖어들 때도 많았고 영화를 볼 때 주인공의 감정에 쓸데없이 과도한 몰입을 해서 불이 밝혀진 후에도 혼자서만 일어나지 못하기도 했다.
감정들을 조절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소화불량이나 구내염은 익숙한 친구였다.
상담을 받으면서 타인의 감정보다는 나의 감정에 고요하게 집중하는 연습을 하고, 그러면서 내 감정을 알아채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의 오랜 우울증도 소화불량도 구내염도 서서히 개선되어 가고 있다.
친정엄마와 그들이 나의 무의식 깊숙한 부분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알았건 몰랐건 그것이 정답인 양 지배받은 관념대로 30여 년을 살아왔고, 늦었지만 이제야 알아챘다.
과거를 바라보고 아파할 수 있다. 아파해도 된다. 아파할 시간이 필요하다면 그것 또한 허용할 것이다. 충분히 아파했다면 그다음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선택이다. 내가 원하는 바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친정엄마를 원망하고 싶지 않았지만 원망하고 있었고, 분노하고 싶지 않았지만 분노하고 있었다. 이해하고 싶었지만 다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고, 나의 과거를 원통해하고 싶지 않았지만 원통했다. 원통의 시간을 보낸 후 깨달은 바는 내가 완벽한 존재가 아니듯 친정엄마도 그들도 완벽하지 않은 존재라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대체 나한테 왜 그랬을까란 질문이 삶이란 전쟁터에서 우연히 만났을 뿐인 사람들에게 과연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자신의 인생에 책임을 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어쩌면 그들 스스로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랬기 때문에 어린아이에게 어른의 삶을 책임지라고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고 비난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내 안 어디쯤에 있을 그들의 유전자를 파내버리고 싶었다. 내 남편 앞에서 어른인 척, 상식적인 척, 교양 있는 척하며 뒤돌아서 내게 폭언을 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구토증이 났었다. 남편이 그들의 본모습을 알게 될까 봐 불안해서 그들을 만나지 않기를 바랐다. 너무 창피했다.
할 수만 있다면 내 육체에 새겨져 있을 유전자 서열을 모조리 꺼내 락스에 넣고 세탁해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들과 무관해질 수 있다면 백 번 천 번이라도 하리라 생각했었다.
고통은 상실에서, 괴로움은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서 온다
삶의 고통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데서 온다. 부모를, 배우자를, 자식을 잃은 이의 삶은 온통 고통으로 얼룩진다. 그렇다면 괴로움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서 온다.
그들이 엄마의 형제라는 것, 내 의식의 깊은 곳을 지배해 버렸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나는 언제까지고 괴롭기만 할 것이다.
괴로움은 엄마가 나를 보호해줬더라면 혹은 내 아버지가 살아계셨더라면 이라는 만약이라는 마음에서 생겨나고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그들이 존재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생겨난다.
그것은 그들의 존재방식이었고, 나는 안타깝게도 그곳에 있었을 뿐이다.
삶의 고통은 피할 수 없지만, 괴로움은 받아들인다면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내게 주어진 삶이고 내 운명이라면. 받아들일 것이다.
과거에는 선택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선택할 수 있다. 나의 온전한 감정을, 흔들리지 않는 내면을, 나의 개별성과 고유성을. 그리고 찾아갈 수 있다. 어떤 것에도 오염되지 않은 오로지 나일 수 있는 나 자신을.
그것이 지금부터 숨을 거둘 때까지의 내 삶의 목표와 의미가 될 것이다.
남보다 나를 사랑하는 일이 훨씬 어려운 일이라는 걸 살아갈수록 더 절절히 느낀다.
사랑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하고, 내 삶을 사랑하므로 모든 것을 받아들일 것이다.
어떤 순간 우주까지 닿을 듯 당당하던 자신감이 어떤 순간 지구 안의 핵까지 파고 들것 같이 후퇴하더라도 그것마저 사랑하겠다. 미숙하더라도 내 삶이니까. 그게 나니까.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