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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들리는 민들레 May 11. 2023

17. 가난은 수치가 아니라 불편이다.

메이저가 아니라 마이너로 살겠습니다.




혹은 그냥 나무



이팝나무, 벚나무, 단풍나무

혹은 그냥 나무


 내가 사는 집 근처에는 이팝나무가 많다. 매년 5월쯤이면 이팝나무 꽃잎이 하얗게 피고 바람이 불면 꽃잎들이 떨어진다. 이팝나무 꽃잎은 벚꽃과 떨어지는 모습이 다른데 벚꽃 잎은 낱장 하나하나가 팔랑거리며 날리는 모습이라면 이팝나무 꽃잎은 잎사귀가 가늘어 360도 회전을 하며 떨어진다. 프로펠러가 돌아가는 것처럼 추락하는 모습이 밌어서 근처에 앉아 한참을 바라보곤 한다.


 이팝나무는 꽃이 피기 전에는 그냥 푸른 나무다. 벚꽃나무도 꽃이 피기 전에는 그냥 푸른 나무다. 꽃이 피어야 이팝나무로 보이고 벚꽃나무로 보인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모든 나무들이 다 그렇다. 은행나무나 단풍나무도 물들기 전에는 그냥 푸른 나무지 않나.



 

 

 하나의 나무는 여러 모습을 가지고 있다. 계절에 따라 달라진다. 벚꽃나무와 이팝나무는 봄에 달라지고 은행나무와 단풍나무는 가을에 달라진다. 그 나무들의 진짜 모습은 무엇일까? 벚나무는 꽃이 필 때가 제일 아름다우니까 벚꽃이 피지 않을 때는 벚나무가 아닌 걸까? 단풍나무는 단풍이 물들 때가 제일 아름다우니까 단풍이 물들지 않을 때는 단풍나무가 아닌 걸까? 벚나무, 이팝나무, 은행나무, 단풍나무, 모두 꽃을 맺거나 물들 때만 그 나무라고 할 수 있는 걸까?








다채로운 인간


가난은 현상이다.



 한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있다. 나무에게 푸른 나무일 때가 있고, 꽃을 맺을 때가 있고, 물들 때가 있는 것처럼 사람도 그렇다. 우리가 바라보는 한 사람의 어떤 모습은 굉장한 단편이다. 한 사람이 가진 외부적인 조건은 그래서 함부로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 꽃이 피지 않았다고 이팝나무 아니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사회에서 긍정이라고 칭하는 어떤 면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의 존재를 비하하거나 비난할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는 가난을 수치로 보는 시선이 있다. 자본주의에서는 누구나 경제활동을 할 수 있고 한 만큼 가져간다(?)는 편견이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일수록 대기업이 한정된 파이의 대부분을 가져가는데도 그렇다. 인류가 시작된 이래 자본은 모든 인간에게 단 한 번도 평등하고 공평한 적이 없었다.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공평하지 않다. 항상 누군가는 더 많이 가지고 누군가는 착취당하는 구조였다. 착취하는 사람들은 계속 착취하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은 계속 착취당하면서 살아왔다.


 한 사람이 가난한 데는 다양한 원인이 있다. 모순적인 사회체제의 원인뿐 아니라 수십 가지의 요인이 있다. 그래서 가난을 개인적인 요인으로만 볼 수 없는 것이다. 가난을 수치로 보는 시선은 가난을 개인적인 요소로만 보는 시선에  뿌리가 있다. 게으르거나 나태해서, 혹은 무지하고 무계획적이라고, 열등하다고 보는 것이다.


 가난을 수치로 보는 시선, 개인의 문제로만 보는 시선의 밑바닥에는 불안이 숨어있다. 그 수치심은 사실 자기 안의 수치심이다. 자신의 수치를 외부에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자신의 수치심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자기 안의 수치심은 자기의 인정욕구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기준에 부합하고 싶은 마음,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마음, 그것이 채워지지 않아 수치심과 불안을 느낀다.


 어떤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에게 수치심을 요구한다. 가난하니까 부끄러워하기를 바란다. 그 마음이 갑질로서 드러난다. 그러나 과연 수치심은 가난한 사람만의 전용 감정일까? 타인에게 수치심을 주고자 하는 마음은 자기 수치심을 증명하는 일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까? 자기 불안과 자기 인정욕구라는 것을 과연 그들은 알고 있을까?


 난은 불편이지 수치가 아니다. 가난은 현상이다. 만약 가난이 수치스럽다면 그 수치가 어디서부터 흘러온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수치심은 절대 혼자서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수치심에는 반드시 타인이 필요하다. 내 삶의 이유가 타인의 승인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짜 수치는 가난이 아니라 내 수치를 감당하지 못해 타인에게 전가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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