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고통을 싫어한다. 아이였을 때는 조금만 아파도 울음을 터트리지만 어른이 되면 그러지 않으려고 한다. 미숙해 보이는 게 싫고 약해 보이는 게 싫다. 또 그런 모습을 남들에게 들키는 것도 싫다. 때때로 그런 미숙하거나 약한 모습이 어떤 관계에서는 약점이 되어 불리한 작용을 하기 때문에도 그렇다.
성숙하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척'을 하고 살지만 사실은 안다. 자기가 오점이 많은 실수투성이 인간이라는 것을. 그래서 스스로 방어하기도 하고 합리화를 하기도 한다.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다.
프리다 칼로 - 상처입은 사슴
프리다 칼로-고통을 위한 그림
프리다 칼로는 건강에서도 사랑에서도 고통을 겪었다. 교통사고에서 그녀의 옆구리를 뚫고 들어간 강철봉은 척추와 골반을 관통해 허벅지로 나왔고 소아마비로 불편했던 오른발은 부서졌다. 그녀 자신도 자신을 부서졌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녀의 남편 디에고 리베라는 모두가 다 알다시피 화려한 여성편력을 지니고 있다.
프리다 칼로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많은 고통들을 가지고 있었다. 글을 쓰며 나의 고통을 폭로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귀처럼 만천하에 그래버렸다. 예술가들은 그래서 어쩌면 불행하지만 행복한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당나귀귀에 대해 외칠 수 있는 도구를 가진 것이니까.
고통스럽지 않으려면 고통스러워야.
옛 어른들 말씀 중에 자기 밥그릇은 자기가 가지고 태어난다는 말이 있다. 현대사회의 자녀교육에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내 부모님은 내게 글쓰기를 가르쳐준 적 없지만 나는 글을 쓴다. 글쓰기는 꾸준하고도 지속적으로 나의 내면적 고통을 마주 보게 했고 그래서 나는 아프지만 그것을 수용하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거부하거나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껴안을 수 있게 되었다.
껴안는다는 건 하나가 되는 것이다. 고통을 껴안는 순간, 삶과 나는 하나가 된다. 고통을 거부하는 마음에 끌려다니는 삶이 아니라 고통의 주인으로서 삶이 시작된다.
그러면 누구 눈치가 보아 지지 않는다. 내게 고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위력이나 권력 같은 것들도먼 일이 되어버린다. 타인에 대한 원망이나 미움도 금방 사라져 버린다. 그것도 내 안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고통과 나라는 걸 알고 있다.
고통을 거부할 때, 고통을 내 것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원망이나 미움으로 사용할 때 피해자가 된다.
주인이 아닌 노예가 되며 인생의 세입자가 된다.
고통을 수용한다는 것은 자책하거나 죄책감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삶과 나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겠다는 선택이다.
프리다 칼로도 그랬으리라 생각한다. 그림이라는 도구를 통해 자기의 고통을 마주 보며 그것을 끊임없이 껴안으면서 살아갔을 것이다.
모든 인간에게는 자기만의 고통이 있다. 나는 그 고통이 당신과 나를 연결하는 보이지 않는 끈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 고통을 느끼듯 이 글을 읽을 당신을 언제나 느낀다.
행복하려면 불행해야 하고, 고통스럽지 않으려면 고통스러워야 한다.그것이 내가 고통을 대하는 자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