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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들리는 민들레 Jul 15. 2024

여는 말. 타인은 결코 통제하거나 조종할 수 없다.

나르시스트와 살아야 한다면





나르시스트


나르시스트라는 단어가 등장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 시기 나 역시 내 주변의 나르들과 싸우고 있었고 언론에 등장하는 분들의 표정과 다르지 않았다. 피해자의 얼굴에 드리워진 우울, 무기력, 수치심, 죄책감들을 보며 조금은 놀랐다. 그들의 생김새는 달랐으나 표정이 쌍둥이처럼 똑같아서.


인류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무수한 지배와 저항이 보인다. 누군가를 지배하려는 무리는 언제 어디나 늘 있어왔고 저항하려는 무리도 언제나 늘 함께 있어왔다. 지배하려는 곳엔 저항이 있었다. 셀 수도 없는 사람들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저항을 해왔다. 왜 그럴까? 나는 그것이 인간의 본질이라  생각한다. 타인에의지하며 살지만 그것이 복종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이라는 종의 본질은 그렇게 단순하지도 간단하지도 않다. 지배와 복종으로 귀결될 수 없다는 얘기다. 지배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특정 대상을 비난하거나 비하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또 특정 대상을 분류하고 정의하고 배제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나는 깊은 아픔을 겪었다. 그 아픔은 성장을 위한 것이었고 나아지기 위한 시발점이었다. 이 글의 본질은 누군가를 미워하기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나를 성장시키기 위해 쓰는 글이다. 이 글을 쓰는 깊은 곳에는 나라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 있으며 나를 사랑하는 만큼 인간이라는 존재 또한 깊이 사랑해 마지않는다. 나는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고 있다. 그들의 방식에 동의하지 않을 뿐.









수치심에서 벗어나야.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때때로 분노에 휩싸인다. 그 사람은 왜 그랬을까. 내게 고통과 아픔을 준 사람이 교통사고라도 나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천재지변은 왜 안나는 것인가, 온갖 원망과 분노, 슬픔, 죄책감, 수치심에 휩싸여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혐오감에 휩싸여 불신을 속옷처럼 입고 다닐 때도 있다. 겉으로는 친절한 척을 하면서 불신이라는 속옷을 입고 있을 때면 나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산불처럼 번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마음들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랑을 본다. 나는 복수심이나 분노의 뿌리가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사랑하지 못할 완벽한 타인이라면 복수심도 분노도 없을 것이지 않을까?


사랑과 기대는 나쁜 것인가? 의지하고 싶은 마음은 나쁜 것인가? 좋지 못한 대상에게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된 나는 수치스러운 존재인가? 상처받은 사람은 상처받을 만한 행동을 했기 때문인가? 누군가에게 상처받았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인가? 미숙하다는 결정적이고도 확고한 증거가 되나?

많은 사람들이 상처받은 자기에 대해 수치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본다. 나도 그랬지만 수치심의 이면에는 상처받았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다. 상처받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수치심이 올라온다. 내가 상처받았고 아팠다는 것을 인정할 때 수치심에서 벗어나 한 단계 성장할 수가 있다.








타인은 통제할 수 없다.



스스로 2차 가해를 하지는 말자. 그 사람은 왜 그랬을까에서 벗어나 나는 왜 그랬을까로 초점을 맞춰보자. 나는 왜 자꾸 자기애적인 이슈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얽히는가? 왜 내 주변의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애적인 이슈를 가지고 있는가?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타인은 통제할 수 없다. 나도 그들을, 그들도 나를 통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이 변하기를 바랐던 긴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기다리지 않는다.

나는 그들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없고 그들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나르시즘적인 엄마에게 키워졌다. 또, 나르시즘적인 남편을 만났다. 러시아인형 마트료시카처럼 나르시즘 뒤엔 또 다른 나르시즘이 있다. 나는 그런 집단 안에 있었고 지금도 발을 담그고 있다. 이 글을 통해서 내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이야기할 것이다. 이유는 어쩔 수 없이 마주해야만 하는 많은 관계들 속에 놓인 사람들이 어떻게 그들을 대해야 하고 어떻게 자기를 지키며 경계를 세워야 하는지 알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내가 꾹꾹 눌러쓴 한 글자 한 글자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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