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길치라 잘 헤맨다. 그리고 계산하거나 따질 줄을 모른다. 그래서 손해 볼 때도 많다. 파워 내향인이라 어딜 가든 중심보다는 입구 쪽에 앉는다. 도주로를 확보해 놓는다고 해야 할까. 사람들 무리에 있을 때는 어느 순간에 끼어들어야 할지 몰라 대답만 하다가 귀가할 때가 많다. 어색한 건 딱 질색이고, 시끄러운 것은 더 질색팔색이라 도서관을 좋아한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도서관에 간다.
조용히 생각하는 것을 좋아해서 내면세계가 풍부하다. 내 내면세계에 입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의 매력에 반하게 될지도 모른다.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하기를 즐기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생각하고 있다가 그들이 두리번거릴 때 짠하고 건네준다.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 위에서 말한 점중어떤 점이 미숙하고 우수하다고 생각하는가?
미숙과 우수는 관점이나 가치관에 따라 달라진다.외향인이 좋다는 관점을 가진 사람이라면 내향인의 자질을 안 좋다고 생각할 것이고, 손해 보는 걸 안 좋게 생각하는 사람은 계산할 줄 모르는 모습을 부정적으로 생각할 것이다. 사람에 따라 바라보는 미숙과 우수가 달라진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미숙과 우수라고 규정짓기보다 그냥 그 사람의 일부라고 생각할 것이다.
나르시즘적인 이슈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확고한 두 가지의 관점을 가지고 있다. 바로 열등과 우월.그들은 왜 그런 관점을 가지게 되었을까? 자기의 모습이 분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타인을 통해 자기를 드러낸다. 그들의 타인을 보는 관점 <열등과 우월> 은 바로 자기 자신의 증명이며 그 자신에 대한 정의를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에 타인이그렇다고 여기며 비난을 하고 더불어 통제까지 하려고 한다.
열등한 가해자
나는 열등한 가해자
나는 과도하게 타인의 눈치를 살폈고 그들이 원하는 걸 말하지 않을 때조차도 원하는 걸 미리 알고 준비해 두었다. 먼저 움직이고 늦게까지 움직였다.내가 얻게 된 것은 우울증과 자살충동이었다. 나는 열등감과 수치심 죄책감으로 살았으며 자기 비하, 자기 비난, 감정부정을 했다. 나는 그들에게 동의했다. 그들의 관점을 의심 없이 내 것으로 받아들였다. 왜 그랬을까?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차차 이야기할 것이다)
나는나르시즘적 어머니에게 길러졌다. 열등과 우월이라는 관점을 지닌 엄마는 늘 나를 열등하다고 비난했다. 사랑받을 행동을 해야 사랑을 받을 텐데 사랑받을 행동을 하지 않아 나쁜(열등한) 딸이었다.
피부가 까매서 빈티 나는 딸이었고, 자신의 새 출발을 방해하는 짐덩이었고, 편안하게 살 집을 사주지 않은 불효자식이었으며, 힘없는 노인을 버린 패륜아로서 온 친적들에게 쓰레기가 되어 있다. 그런 역사는 마흔이 넘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물론 손절했다. 그랬음에도 나에 대한 그녀의 정의 <넌 열등해, 그러니 내 통제에 따라.>는 유구하게 계속된다.
나는 열등한 가해자가 되었다. 열등하기 때문에 그녀에게 피해를 준 것이다. 신기한 일이다. 그녀 말처럼 내가 열등한 존재라면 왜 그녀에게 피해가 되는 걸까? 그녀가 열등함이 그토록 싫다면 다 큰 자식 안 보면 되는 것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찾아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분법적 관점
나르시시즘적 엄마는 자신의 싫은 열등함을 자녀에게 전가하고 그 자녀를 통제하려는 방식을 취한다. 열등과 우월의 이분법적인 자기 분열이 그 뿌리이며거기에서 자신이 점유하고자 하는 위치는 언제나 우월이다. 그 우월감이 흔들릴 때 그것을 감당하기 위해서 열등한 배역이 필요한 것이다.
자신의 필요를 자신이 적절히 채우고 조절하지 못하기 때문에 반드시 타인이 필요하고 그 점에 있어 몹시의존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절대 자신이 의존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네가 열등하기 때문에 내가 돕는 것>이라고 생각할 따름이다.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렸음에도 그녀는 내 모든 부분을 비난하고 통제하고자 했고 아무 때나 찾아왔다. 나는 그녀와 연락을 끊었고 많은 일들이 있었다. 고통스러웠고 비통했다. 왜 내게는, 가장 근본적인 사랑이 허락되지 않는가라는 질문이 해결되지 않았었고 슬프고 화가 났다. 끊임없이 분노가 일어났고두 아이의 엄마가 되는 일도 무척 어려웠다.
그러나 지금은 치유해가고 있는 중이다. 정신과 치료도 받았고 심리치료도 진행 중이며 심리에 대해 학부 공부도 하고 있다. 많아 나아졌는가 싶어 들여다보면 여전히 아프고, 또 아직도인가 싶어 들여다보면 어느 구석은 굳은살이 생겨있기도 하다. 그래도 많이 나았다.
전처럼 슬프지 않은 것이 그 증거이고 전보다 더 많이 분노하는 것이 그 증거이다. 건강한 사람만이 분노할 수 있다는 걸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