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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들리는 민들레 Jul 15. 2024

1. 이분법적인 관점-열등과 우월

나르시스트와 살아야 한다면



분열


통합되지 않은 것은

분열을 의미할 수도



나는 길치라 잘 헤맨다. 그리고 계산하거나 따질 줄을 모른다. 그래서 손해 볼 때도 많다. 파워 내향인이라 어딜 가든 중심보다는 입구 쪽에 앉는다. 도주로를 확보해 놓는다고 해야 할까. 사람들 무리에 있을 때는 어느 순간에 끼어들어야 할지 몰라 대답만 하다가 귀가할 때가 많다. 어색한 건 딱 질색이고, 시끄러운 것은 더 질색팔색이라 도서관을 좋아한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도서관에 간다.


조용히 생각하는 것을 좋아해서 내면세계가 풍부하다. 내 내면세계에 입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의 매력에 반하게 될지도 모른다.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하기를 즐기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생각하고 있다가 그들이 두리번거릴 때 짠하고 건네준다.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 에서 말한 점중 어떤 점이 미숙하고 우수하다고 생각하는가?

미숙과 우수는 관점이나 가치관에 따라 달라진다. 외향인이 좋다는 관점을 가진 사람이라면 내향인의 자질을 안 좋다고 생각할 것이고, 손해 보는 걸 안 좋게 생각하는 사람은 계산할 줄 모르는 모습을 부정적으로 생각할 것이다. 사람에 따라 바라보는 미숙과 우수가 달라진다. 리고 어떤 사람은 미숙과 우수라고 규정짓기보다 그냥 그 사람의 일부라고 생각할 것이다.


나르시즘적인 이슈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확고한 두 가지의 관점을 가지고 있다. 바로 열등과 우월. 그들은 왜 그런 관점을 가지게 되었을까? 자기의 모습이 분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타인을 통해 자기를 드러낸다. 그들의 타인을 보는 관점 <열등과 우월> 은 바로 자기 자신의 증명이며  자신에 대한 정의를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에 타인이 그렇다고 여기며 비난을 하고 더불어 통제까지 하려고 한다.






열등한 가해자



나는 열등한 가해자



나는 과도하게 타인의 눈치를 살폈고 그들이 원하는 걸 말하지 않을 때조차도 원하는 걸 미리 알고 준비해 두었다. 먼저 움직이고 늦게까지 움직였다. 내가 얻게 된 것은 우울증과 자살충동이었다. 나는 열등감과 수치심 죄책감으로 살았으며 자기 비하, 자기 비난, 감정부정을 했다. 는 그들에게 동의했다. 그들의 관점을 의심 없이 내 것으로 받아들였다. 왜 그랬을까?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차차 이야기할 것이다)


나는 나르시즘적 어머니에게 길러졌다. 열등과 우월이라는 관점을 지닌 엄마는 늘 나를 열등하다고 비난했다. 사랑받을 행동을 해야 사랑을 받을 텐데 사랑받을 행동을 하지 않아 나쁜(열등한) 딸이었다.

피부가 까매서 빈티 나는 딸이었고, 자신의 새 출발을 방해하는 짐덩이었고, 편안하게 살 집을 사주지 않은 불효자식이었으며, 힘없는 노인을 버린 패륜아로서 온 친적들에게 쓰레기가 되어 있다. 그런 역사는 마흔이 넘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물론 손절했다. 그랬음에도 나에 대한 그녀의 정의 <넌 열등해, 그러니 내 통제에 따라.>는 유구하게 계속된다.


나는 열등한 가해자가 되었다. 열등하기 때문에 그녀에게 피해를 준 것이다. 신기한 일이다. 그녀 말처럼 내가 열등한 존재라면 왜 그녀에게 피해가 되는 걸까? 그녀가 열등함이 그토록 싫다면 다 큰 자식  안 보면 되는 것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찾아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분법적 관점


나르시시즘적 엄마는 자신의 싫은 열등함을 자녀에게 전가하고 그 자녀를 통제하려는 방식을 취한다. 열등과 우월의 이분법적인 자기 분열이 그 뿌리이며 거기에서 자신이 점유하고자 하는 위치는 언제나 우월이다. 그 우월감이 흔들릴 때 그것을 감당하기 위해서 열등한 배역이 필요한 것이다.


자신의 필요를 자신이 적절히 채우고 조절하지 못하기 때문에 반드시 타인이 필요하고 그 점에 있어 몹시 의존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절대 자신이 의존적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네가 열등하기 때문에 내가 돕는 것>이라고 생각할 따름이다.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렸음에도 그녀는 내 모든 부분을 비난하고 통제하고자 했고 아무 때나 찾아왔다. 나는 그녀와 연락을 끊었고 많은 일들이 있었다. 고통스러웠고 비통했다. 왜 내게는, 가장 근본적인 사랑이 허락되지 않는가라는 질문이 해결되지 않았었고 슬프고 화가 났다. 끊임없이 분노가 일어났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는 일도 무척 어려웠다.


그러나 지금은 치유해가고 있는 중이다. 정신과 치료도 받았고 심리치료도 진행 중이며 심리에 대해 학부 공부도 하고 있다. 많아 나아졌는가 싶어 들여다보면 여전히 아프고, 또 아직도인가 싶어 들여다보면 어느 구석은 굳은살이 생겨있기도 하다. 그래도 많이 나았다.

전처럼 슬프지 않은 것이 증거고 전보다 더 많이 분노하는 것이 그 증거이다. 건강한 사람만이 분노할 수 있다는 걸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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