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내면에 해결되지 않은 부모님에 대한 감정이 아주 진하고 깊게 뿌리 박혀 있다는 걸 경험한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
우울증 진단을 받고 치료가 필요하다는 걸 알았을 때 그 이야기를 남편에게 말했다. 그 이야기를 한 순간 남편은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 네, 엄마 요즘도 약 잘 드시고 계세요?
이 사건이, 내가 그를 파악하는데 결정적인 단서가 되었다. 아내가 아프다는데 왜 시어머니에게 전화를 했을까? 게다가 그 이야기를 했을 때 나에게는 어떤 코멘트도 없었다. 정말 이상하지 않은가? 이건 단순히 나에 대한 무시나 존중의 영역이 아니다. 굉장히 이상한 일이다. 남편이 전화를 끊자 나는 물었다.
/내가 아프다는데 왜 어머님께 전화를 하는 거야?
이때 남편의 대답이 그의 해결되지 않은 뿌리를 정확히 드러낸다.
/ 넌 혼자서 잘하잖아. 우리 엄만 혼자서 못 해서 챙겨줘야 해.
온 천지에 삼각관계
여기도 삼각관계
그때 내가 느꼈던 분노, 좌절감, 슬픔, 외로움은 정신과에서 다 풀어냈고 지금의 나는 그 사건을 그의 뿌리를 설명하는 압도적인 사건이라고 해석한다.
시아버지가 안 계신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근처에 형님도 사신다. 그런데 왜 남편은 시어머니를 챙겨야 한다고 했을까? 그리고 왜 꼭 그 순간 시어머니에게 전화를 해야 했을까?
그는 나와 결혼하지 않았고 어머니와 결혼했다. 몸은 떨어져 있지만 심리적으로 자기 어머니와 결혼한 상태인 것이다. 그래서 한 공간에서 이야기를 나누지만 그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왜? 왜일까?
시어머니와 시아버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권력의 완벽한 불균형을 이루고 있었는데 주요 권력은 아버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아버님도자아도취적이어서 시어머니에게 열 등 이를 부여하고 계셨다. 평생 부여하셨을 것이고 아마 어머님은 그래서 우울증을 얻게 되었을 것이다. 내가 결혼한 지 십칠 년이 넘었는데 대부분의 시간 동안 어머님은 우울증 약을 드시고 계셨다.
시댁에서 시어머니는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모든 걸 도와줘야 하는 사람 >이다. 어머니는 혼자서는 마트에 가지도 시장에 가지도 않는다. 친구를 만나러 외출을 하지도 않는다. 마치 죽을 날을 받아놓은 사람처럼 아무것도 못한다. 왜 그럴까? 자신은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이니까. 그런 정의는 누가 내렸을까? 아버님이다. 그런 아버님과 대화가 통할리 없는 어머님은 정서적 욕구를 누구에게 풀었을까?
내 남편이다. 왜 큰 아들에게는 풀지 않고 차남인 남편에게 풀었을까? 큰아들은 우월의 배역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열등의 역할은 남편이었다. 그래서 어머님은 자신이 남편(아버님)과의 관계에서 불편한 감정이 들 때마다 남편(작은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하소연을 했다. 놀라울 정도로 흡사한 삼각관계가 여기서도 펼쳐진다. 재방송을 보는 것 같다.
시어머니에게 전화가 올 때마다 남편은 그걸 해결하고자 아버님께도 전화, 아주버님한테도 전화를 하고, 어머니를 위로한다.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그의 노력은 통했을까? 절대 아님이다. 모든 일은 아버님 마음대로, 아주버님 마음대로 흘러간다. 늘 언제나처럼. 이때 남편의 깊은 곳에는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무기력감과 무가치감이 생성된다. 그런데 그것은 시어머니가 건네준 것이다. 난 이거 싫어. 그니까 네가 가져라.
이 정도 되면 큰 아들보다 작은 아들이 더 좋을 것 같고 의지가 되겠지만 아니다. 시어머니는 우월한 큰 아들을더 인정하고 의지한다. 왜? 아버님이 우월을 더 좋아하니까. 시어머니의 지위를 높여준 건 큰 아들이므로. 그 옆에 있어야 나도 우월해지니까. 그래서 남편(작은 아들)에게는 자신이 불리하거나 난처하거나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이 들 때만 전화를 한다. 남편은 매우 조건적인 인정을 받았을 것이고 열등하지 않기 위해 부모의 말을 거역하지 않으려 노력했을 것이다. 그 모든 노력에도 결국 남편은 시댁의 쓰레기통이 되었다. 남편은 자신이 그런 관계에서 성장했고 지금까지 놓여있다는 걸 알까?
그런 아버님의 행동이 두 아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리 없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지배이며 돌봄이 아니라 자기 의존이다. 시어머님은 그런 것들을 덥석 덥석 평생 받으며 살아왔고이제는 스스로 말한다. 나는 아무것도 못 해.내가 만약 남편의 방식에 계속 동의하며 살아간다면 만들어질 나의 미래를 시어머님이 직접 시연해 보여주셨다. 처음엔 아버님이 미웠다. 그러나 오랜 시간 지켜본 결과, 그러한 관계적 양상은 한 사람만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얼마 전 친척 결혼식이 있었다. 시아버지는 오 남매의 장남이다. 밑으로는 여동생 네 명이 있는데 식당에서 먼 친척의, 식구가 많아 누가 누군지 모르겠다는 지나가는 한마디 말에, 결혼식장 로비에 온 식구를 불러 모으고 서열대로 줄을 세웠다. 그리고 손수 얘는 누구네 첫째 둘째, 얘는 누구네 첫째 둘째... 소개를 하셨다. 나는 그때 시아버지의 자아도취적인 면모를 보았다. 누구도 그렇게 해달라고 요청하지 않았고 그렇게 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아버님의 인정욕구, 멋진 나를 드러내기 위한방식이 그렇게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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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시스트뒤에는 또 다른 나르시시스트가
나르시시스트의 뒤에는 또 다른 나르시시스트가 있다. 시아버님의 건강하지 못한 자기애는 아주버님 그리고 남편까지 이어졌다.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자녀들을 협동관계가 아니라 경쟁관계로 만든다. 경쟁을 통해 한 아이는 우월해지고 한 아이는 반드시 열등해진다. 그게 바로 나르시시스트의 방법이며, 자아도취적 면모를 대물림시킨다. 그들의 내면이 그에 맞는 현실을 창조해 낸다.
우월의 역할을 맡은 자녀에게는 부모가 부정적 감정을 주지 않기 때문에 우월의 역할만 수행하며 산다. 뭘 해도 칭찬만 받았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상황을 맞이하면 견딜 수 없어한다. 타인에게 열등을 부여하고 깎아내리며 비난한다.
열등의 역할을 맡은 자녀에게는 부정적 감정만 주고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열등의 역할을 맡은 자녀는 부모의 쓰레기통이 되어 부정적 감정만 가지게 되고 부모를 돌보아야 한다는 책임감을 갖게 된다. 계속 열등하지 않기 위해 부모를 거부하지 못한다.
그 내면에는 인정에 대한 갈구, 부모의 사랑에 대한 갈구가 있지만 스스로 그것을 인지하지는 못한다.
그런 마음 자체를 열등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서의 핵심은 누구도 기쁘고 행복하지 않다는 데 있다. 시아버지 시어머니 두 아들, 게다가 그 아들과 결혼한 여성들까지.
가끔 시부모님 생신이나 행사가 있어 식당에 모여 온 식구가 식사를 할 때가 있다. 그때 아버님과 아주버님과 남편의 방식이 너무 잘 보여서 놀란다. 정말 놀라울 정도로 각자 자기 할 말만 이어진다. 오랜만에 만나서 부모가 자녀에게 궁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닐 텐데도 그것보다는 <자기 얘기>만 이어진다. 자기가 무엇을 잘 해낸 이야기, 자기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행동에 관한 이야기들이 주로 이어진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깨닫는다. 그들은 정말 타인에게는 관심이 없다는 걸.
나르시시스트의 아내들은 어떨까? 한 사람은 나는 아무것도 못해로 아버님을 온전히 담고 있고, 한 사람은 우월이를 온전히 담고 있다. 내가 하는 이야기에 너는 언제나 긍정적으로 대해야 해 태도를 갖고 있다. 그래서 큰 아들 내외는 아버님의 우월을 모조리 받으셨기 때문에 본인들에게 명령권과 통제권이 있다고 여긴다. 나와 남편에게 명령을 하신다. 그거 해, 저거 해.내가 못한다고 거절하면 언짢아하신다. 형님은 며느리인데도 시부모님의 입장을 대변하신다. 왜냐하면 시부모님이 권력을 주었기 때문에.
먼 거리 유지
나르시시스트 시댁식구들을 대하는 방법
- 거리유지
그들이 원하는 것 한 개 주고, 그들이 원하는 것 한 개 박탈하기 - 통보
다시 말하지만 나르시시스트는 말로 거절하거나 말로 무엇을 하는 것은 절대 통하지 않는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판단하고 행동하고 생각할 뿐이기 때문에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 무척 필요 없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나의 경우에 이런 방법을 썼다. 명절날 일찍 오기를 바라시는 시부모님의 요구를 먼저 수용한다. 일찍 가서 시키는 일을 한다. 시부모님이 원하는 건 언제나, <일찍 오고 늦게 가기> 다. 그럴 때일찍 가서 할 일을 하고 해 지기 전에 일어난다. 그러면 왜 벌써 가냐고 하신다. 딱 한마디 하고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일어나면 된다. 일찍 일어났더니 피곤해서 쉬고 싶네요. 그러면 끝이다.
이어지는 뒷말을 들을 필요 없다. 통보하면 된다.
우리 시댁은 김장을 모여서 하는데 모여서 하다 보니 늘 허드렛일은 하던 사람만 해서 너무 힘들어서 분리했다. 배추를 주시면 감사합니다 하고 받는다. 그리고 저희 입맛대로 저희끼리 하겠습니다. 말하고 그렇게 했다. 그러면 시부모님은 사서 드시든지 아니면 조금만 담가서 드실 게 아닌가.
요즘 명절 음식은 형님네와 우리가 각자 집에서 만들어서 시댁에서 차려 먹는데 그때 메뉴를 시아버님이 분류하신다. 그때는 메뉴 중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한다. 그거 안 해도 되나요? 어쩌나요? 물어볼 필요 없다. 가서 그거 안 했니? 물으시면 딱 한마디 통보하면 된다. 너무 번거로와서요.
나는 인연을 끊고 싶다. 생각한다면 그냥 끊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애매하다 싶은 경우도 있다. 분명히 나르시즘적이긴 한데 그렇다고 너무 고통스럽게 하지는 않는다. 기분 나쁘고 불쾌하긴 하지만 뭐 이 정도는 참아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런 방법도 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지금 당장 연을 끊을 수 없는 경우들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사용하기에 괜찮은 방법이다. 시부모님으로서도 마음에 들진 않지만 그렇다고 꼬투리 잡기에는 애매한 입장이 된다. 물론 더 심한 시부모님들도 있다.
사적인 얘기를 하지 말자.- 건조하게
요즘 내 기분, 요즘 내가 하는 일, 생각 같은 것들을 말해봐야 판단과 평가만 날아오므로 얘기할 필요 없다. 꼬투리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나는 시댁에 가면 딱 세 마디만 한다. <그러시군요. 네. 아.> 그게 다다. 그리고 가끔 뭘 물어보시면 최대한 단답식으로 얘기하고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 없다. 그들이 묻는 질문은 내가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니기 때문에 알려줄 필요가 없다.따분하고 지루하다면어린 조카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자. 그게 더 생산적이다.
그들에게 꺼리를 주지 않는 것 그래서 이 관계를 아주 건조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이 핵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