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내 주변의 삼각관계에 대해서 썼다. 그것이 좋은 기능을 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것을 알아채기 이전의 나는 어땠을까?
여러 일들, 그러니까 내 유년기에 일어난 일, 남편과의 관계, 시댁과의 관계에서 벌어진 많은 일들에 대해 쓰면서 마치 나는 그들과 다른 것처럼, 마치 나는 그들과 다른 성숙한 인간인 것처럼 보여질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결코 아니다. 나는 무척 미숙하고 의존적이었다. 타인의 감정을 내 감정인 양 착각하기도 했고, 의존과 의지를 구분하지 못하기도 했다.
나의 내면은 뒤죽박죽 엉망징창이었다. 뿌리 빼고는 쓸만한 게 하나도 없어 보일 지경이었다.
여러 삼각관계에 대해 썼지만 내가 그런 관계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남편은 나와 큰 아이로 삼각관계를 만들었고, 나는 작은 아이와 남편으로 삼각관계를 만들기도 했다. 그때는 몰랐다. 통찰하기 이전에는 몰랐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생기며 알게 되었다. 큰아이와 작은 아이의 다툼이 자꾸만 불거지기 시작했다. 형제자매는 싸우기도 하고 그런 거겠거니 생각하고 말았던 시간들에서 뭔가 이상함을 감지하게 되었다.
자기 혐오
자기혐오
나 자신이 너무 혐오스러워서 괴로웠다. 아니 괴로움을 넘어 고통스럽기까지 했다. 내가 그토록 증오하던 행동을 복사해서 하고 있었다니... 배운 게 도둑질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겠구나 싶었다. 그러나 자책만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아이들은 계속 자랄 것이기에 시급한 변화, 빠른 대처가 필요했다. 이런 생각들은 내가 심리에 대해 공부를 하면서 여러 이론들을 접하게 되고 그것을 내 가정에 대입해 보는 과정에서 알게 된 일이다.
그 즉시 삼각관계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의도적으로 철수하는 작업들을 했다. 아이들 앞에서 남편에 대해 긍정적인 말들을 하고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아빠에게 물어보기를 권하기도 했다. 과도하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했고 거리와 공간을 두고 그저 권유로서 남겨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 그리고 나 자신도 전보다 훨씬 조심했다. 나도 모르게 아이들 앞에서 남편을 부정적으로 말한다거나 깎아내린다거나 하는 행동을 하지 않도록 매일매일 노력했다.
앞서도 말했지만 남편은 감정을 이야기하는 것을 열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이들이 감정을 이야기할 때 인지적 대응을 한다. 그런 아버지를 아이들은 그다지 신뢰하지 않고 필요할 때만 따랐다. 아이들과 남편 사이에 분쟁이 자주 생겼다. 이분법적으로 인지적 대응을 하니 그럴 만도 했다. 나는 아이들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빠를 무시하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 분쟁들을 보면서도 개입하지 않아야 했다. 내가 개입하는 순간 삼각관계가 되니까. 그래서 따로따로 이야기를 나눴다. 아이의 화난 마음을 읽어주고 수용해 주고 공감해 주고 더 나은 표현방식에 대해 의논했다. 또 남편과는 아이에 대해 어떤 감정이 드는지 묻고 부모로서 더 좋은 방법은 무엇 일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 과정 속에서 내 감정은 어떤지도 느끼고 생각해보아야 했다. 바빴다. 학기 중에는 더 바빴다. 공부하랴, 집안일하랴, 아이들 마음 살피랴, 남편하고 대화하랴...
멀리 보면 다 거기서 거기
남 원망할 거 없다.
적절한 가정에서 적절한 양육을 받고 성장해서 가정을 이뤄 살아도 삶은 기본적으로 힘든 일이다. 그러나 부적절한 양육환경에서 자란 내가, 나르시스트 남편과 결혼을 하고, 시댁도 온 천지가 나르시스트인데,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까지 잘 키워야 하니 얼마나 힘든 일인가. 보통사람들의 삶의 고통이 100이라면 나는 500 정도의 고통을 지닌 채로 살아야 한다. 만성적인 고통이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이런 삶을 누가 창조했을까? 바로 나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누구 원망할 거 없었다. 누칼협이런 결혼, 누가 하라고 칼 들고 위협했는가? 그리고 이런 결혼, 계속 유지하라고 누가 칼 들고 위협하고 있나?
아이들이 몸과 마음 모두 건강하게 잘 자라길 바랐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건강해지고 강해져야 했다. 게임 캐릭터가 강해지려면 아이템을 획득해야 강해진다. 그러나 인간이 강해지려면 과거의 기억을 딛고 <다른 선택>을 해야 한다. 무엇을 얻어야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수용하고 <다른 선택>을 해야 비로소 강해진다. 무엇을 얻어서 강해지면 무엇이 사라졌을 때 강함도 사라진다. 빈손으로도 강해질 수 있다. 인간의 내면에 생겨난 강함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고 누구로부터도 강탈당할 수 없다.
내가 삼각관계에서 철수하고 남편에게도 철수를 권유하면서 서서히 삼각관계들이 사라졌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자매 간의 협력의 순간과 대화의 시간이 늘어났다. 서로를 증오하는 것이 아니라 돌보아야 하는 대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일찍 일어난 작은 아이가 큰 아이를 깨우기도 하고, 열어 놓고 잠든 작은 아이의 방문을 큰아이가 살짝 닫아주기도 했다.
또 아빠에 대한 분노도 전보다는 많이 줄었다. 나는 부모도 실수하고 부족할 수 있다는 걸 아이들에게 늘 이야기한다. 그렇지만 너희들을 사랑하는 마음은 깊기 때문에 언제나 노력하겠다고 말한다. 나는 좋은 부모는 아니다, 그렇지만 <다른 선택>을 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부모다. 여전히 미숙하고 부족하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많은 시간을 노력 속에서 살아야 할 것을 안다.노력도 계속하다 보니 습관이 된다.
다만 노력이란 건 자연스러움과는 다르다. 깊이 사랑받은 경험이 있어서 그것을 자연스럽게 다시 내어주는 것과 노력해서 일구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그게 아이들에게 미안하다. 자연스럽게 사랑을 줄 수 없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