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각하게 고민했다. 왜 내 주변에는 나르시즘적인 사람이 많을까? 마치 그런 곳만 찾아다니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찾아다니던가 아니면 그들이 나에게 끌려서 단체로 오던가 둘 중 하나가 아닐까 정말 진지하게 고민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빙산에 비유한다. 우리가 의식하는 건 빙산의 일부일 뿐이라는 그의 이론대로라면 내가 아는 나보다 내가 모르는 내가 더 많고 내 의지의 행동보다 의지하지 않은 무의식적 행동이 더 많다. 그렇다면 나는 왜 자기애적인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하게 되는 걸까? 그런 걸 정신분석에서는 반복강박이라고 하고, 심리학에서는 미해결과제라고 하고, 불교에서는 업보라고 한다. 왜 계속 반복하고 반복되는 걸까?
나는 그것이 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나를 미워하기 때문에 나에게 고통을 주는 대상을 만나는 상황을 만들어서 그 사람이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면 나는 피해자가 되니까. 사람들은 가해자보다는 피해자에게 더 관대하니까. 나름의 사랑받기 위한 행동이 아닐까? 근데 이거 참 어디서 많이보던(친정엄마) 방식이다.
또 그럴 수도 있다. 내가 나를 미워하고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기 때문에 나에 대한 처벌적 의미로 나를 멸시하는 대상을 선택했을지 모른다.
아니면, 내가 그토록 갖고 싶었던 것이 내 존재에 대한 사랑이었으니 그 사랑이 충만해 보이는 웅대한 자기상을 가진 사람을 선택했는지 모른다. 내가 갖고 싶었던 건 무리에서 미움받는 열등한 자기가 아니라 우월한자기였을 테니까.
현실창조
현실창조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설득력이 있지 않은가? 시크릿에 등장한 끌어당김의 법칙에 의하면 무의식이나 잠재의식이 현실을 창조한다는 말이 있다.만약, 어느 날 빨간색 자동차를 사고 싶은 마음이 들었는데 그런 마음을 가지고 외출했을 때 그날따라 빨간색 자동차만 많이 보이는 경험,단발로 머리카락을 커트하고 싶은데 긴 머리라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 한 외출에서 단발머리 스타일을 한 여성만 눈에 더 많이 보이는 경험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 짧은 경험에서도 그러는데 하물며 깊고 방대한 무의식의 세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어떻게 아나? 아마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고 많이 사랑받는 멋진 자기를 갖고 싶고, 아마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나 자신을 벌주고 싶은지도 모른다. 그래서 단순히 그들을 미워하기만 할 수가 없다. 나는 멀리해야 될 사람들, 마주치면 무조건 도망쳐야 할 괴물 같은 사람들이라는 정의를 내릴 수 없고 그들의 본질에 대해 전적으로 증오와 혐오심만을 품을 수가 없다.
나 역시, 나 자신을 학대하고 괴롭혔기 때문이다. 그들이 입 밖으로 꺼내는 말도 안 되는 말을 나는 나 자신에게 해본 적이 없던가? 한 번도?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았던가? 그렇다고 그들의 행동이 정당하다는 건 아니다. 본질은 이해하지만 방식은 동의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추호도 동의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생각이고 내 깊은 곳 내가 알지 못하는 어디쯤에는 이런 현실을 창조하기를 원하는 바람이 있지는 않았을까?
피해자임과 동시에 가해자
피해자임과 동시에 가해자
그래서 나는 그들과의 관계에서 나 자신을 피해자임과 동시에 가해자라고 정의한다. 누군가에게는 이것이 자책으로 보일지도 모르나 반성에 더 가깝다.
나는 왜 그들과 인연을 맺었을까? 나는 왜 그들에게 동의했을까? 나는 왜 그들에게 잘 보이려고 애썼을까? 나는 왜 그들과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려고 했을까? 나는 왜 그들의 멸시가 그토록 비통하고 마음이 아팠을까? 나는 왜 좀 더 일찍 깨닫지 못했을까? 나는 왜 좀 더 내게 좋을 사람을 찾지 않았을까? 나는 왜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사람에 대한 다양한 경험을 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나는 왜 그들의 말을 그렇게 믿었을까?
가장 나쁜 건, 그들이 아니라 바로 나인지도 모른다. 내가 지향하는 건 그들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아는 것, 나르시즘이 무엇인지에 대해 아는 것을 넘어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더 많이 알아가고 더 깊은 곳까지 탐색하는 일이다. 진짜 원하는 건, 그들에서 끝이 아니라 나로의 귀결이다. 그들을 나를 알아가고 탐색하는 모퉁이로삼으려 한다.
담길 수 없는 사람
비난을 받을 때
우리는 흔히 누군가에게 비난을 받았다고 느끼면, 저 사람은 왜?라는 생각을 한다.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 거지? 나도 모르게 관점이 그 사람에게 맞춰진다. 저 사람은 왜 그렇게 말했을까? 하고 말이다. 그러나 방향을 바꿔볼 필요도 있다. 그는 왜? 에서 나는 왜?로 뱡향을 바꿔보면 내가 알지 못했던 나의 어떤 부분이 움직이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나는 왜 저 사람의 비난이 기분이 나쁠까? 저 사람이 내게 중요한 사람이라서? 아니면 비난의 내용이 너무 화가 나서? 비난의 내용이 왜 화가 나지? 어떤 부분이 화가 나는 거지?
저 사람이 어떻게 말하면 기분이 나쁘지 않았을까? 그렇게 말해주면 화가 나지 않았을까? 아 나는 무엇을 원하는구나. 아 내 안에는 그런 마음이 있었구나. 를 알게 된다.
어떤 감정인지 들여다보고 어떤 생각인지를 탐색하다 보면 결국에는 알게 된다. 이 관계에 기여하고 있는 것은 그 사람뿐만 아니라 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런 깨달음을 가지고 현재의 관계를 바라보는 것과 그런 깨달음이 전혀 없이 현재의 관계를 바라보는 것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다. 자기 자신을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관계 그리고 관계 너머의 삶까지 멀리 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나르시시즘적인 사람은 자기 자신부터 우월과 열등의 기준으로 가둬놓기 때문에 관계와 관계 너머의 삶을 단편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들은 무한한 꿈을 꾸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무척 제한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다.
나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입체적이고 깊고 넓은 관점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새 그들의 가스라이팅에 잠식되어 그들이 규정하는 내가 되어버릴 수 있다. 내가 크고 넓은 사람이 되면 그들이 먼저 알아챈다. 저 사람은 내 그릇에 담기지 않을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는 것이다. 그들이 담을 수 없는 사람이 되자. 그러면 굳이 손절하지 않아도 그들이 먼저 떨어져 나갈 수 있다. 이 사람과는 게임이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을 때 느낄 수치심을 피하기 위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칠 수있다. 물론 아닐 수도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