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원의서랍 _크클기록
2020.01.03 시즌 크리에이터클럽(크클) 쓰다보면팀 주간미션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미션 내용
2002년 겨울을 배경으로 20대 남녀의 로맨스 소설을 쓰시오.
“2084, 차주시죠?
차 좀 빼주셔야 되겠는데요.”
방금 카페로 들어와 커피를 주문한 두 남녀. 실내의 온기를 느낀 지 몇 초 만에 다시 밖으로 나가야 하는 게 영 아쉬운 표정이다. 테이크아웃으로 주문을 변경하고 잠시 카페 안을 서성인다. 희진은 벽에 달린 거울을 발견하고 걸어오는 내내 바닷바람에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진다.
바다 내음이 그리워진다는 건 서울살이에 지쳤다는 것. 오랜만에 내려온 부산은 별다를 게 없다. 해운대 앞바다에는 여전히 이런 저런 사람들이 웃고 떠들고 있다. 어디서 주어온 나뭇가지로 모래에 무언가를 끄적이는 이들, 갈매기에게 과자를 던져 주는 이들, 파도 놀이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희진은 카페로 오기 전 해변에서 신발 안으로 모래가 잔뜩 들어갔음을 느낀다. 발이 따끔따끔해 어딘가 걸터앉아 모래를 털어내고 싶지만 내심 옆에 있는 그에게 신경이 쓰인다. 대신 곧 나가야 하는 공간을 둘러본다.
"이 그림 예쁘지 않아요?"
탁자 위에는 여린 새싹처럼 생기 넘치는 연두빛을 담은 그림 한 점이 걸려 있었다. 여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 남자는 커피를 받아들고 답한다. ’그러네요. 희진 씨, 이 카페는 다음에 다시 와요‘라고 작게 속삭인다. 그에게 커피를 건네 받자 손 끝이 따듯하게 데워진다. 미처 다 둘러보지 못한 공간에 아쉬운 눈길을 주며 밖으로 나서는 희진. 그런 그녀의 옆모습을 남자가 어떤 눈빛으로 바라보는지 희진은 전혀 알지 못하는 눈치이다. 그녀가 빠져나갈 때까지 그는 카페의 철문을 뒤에서 조용히 힘주어 잡고 있을 뿐이다.
골목 어귀에서 나와 해운대 공영주차장으로 자리를 옮겨왔다. 주차를 마치자 습관대로 차 문을 열고 내려선 둘. 커피를 손에 쥐고 밀려오는 바닷바람을 느끼며 바다 가까이로 내려간다. 희진은 슬쩍 눈을 감아본다. 파도 위로 파도가 밀려와 포개지는 소리. 단단히 뭉쳐있는 마음이 파도 소리와 함께 부수어지는 기분이 든다.
"차로 다시 돌아갈래요?"
차가운 공기가 희진의 두터운 코트를 비집고 들어가 마치 당장이라도 감기에 걸릴 듯 염려하는 투로 남자는 말한다. 그제야 희진은 자신이 눈을 감고 말도 없이 하염없이 서있었다는 걸 눈치챘다. 바닷바람에 몸을 내던지듯...그러는 게 좋겠다고 대답한다. 둘은 서로의 옷깃이 스치는 소리를 들으며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사장을 걸어 올라간다.
오늘은 2002년 2월 2일, 숫자로만 적어보면 20020202. 숫자 2와 0이 무한대의 수열처럼 또는 이진법처럼 나열되는 날이다. 둘은 서로를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게 신기하다며 날짜를 세어본다. 2001년 12월 31일, 제야의 종소리를 우연히 함께 들은 사이. 그리고 2002년 2월 2일 둘은 히터가 나오는 차 안에서 몸을 녹이며 커피를 마신다. 희진은 2와 0 사이에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아휴 정말 모르겠다, 하고 속으로 생각한다.
“희진 씨, 제가 많이 좋아합니다. 희진 씨를.”
몸을 돌려 그녀의 손을 잡고 눈을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제가 정말 많이 좋아하게 됐습니다. 희진 씨’라는 말을 덧붙인다. 이것이 그로부터 처음 듣는 고백이 아니다. 희진은 이미 그의 고백을 몇 주 전에 받았었다. 친한 친구의 결혼식 청첩장을 받고 사정이 생겨서 못 가게 된 사람처럼, 그의 고백을 받고 고민을 이어오던 그녀이다. 해가 바뀌면서 서른에 더 가까워진 겨울, 희진은 몹시 피로를 느꼈고, 그 피로가 관계에 들인 정성이 허무함으로 바뀔 때 몰려오는 것임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사람도 사물처럼 물성이 있어 이제는 누구에게 긁히고 싶지도, 부딪히고 싶지 않은 그녀이다. 생각이 깊지만 어둡고 딱딱한 사람, 밝은 성품이지만 깊이가 얕은 사람, 학문적으로는 뛰어나지만 아기처럼 무른 사람. 매사에 배려심이 뛰어난 줄 알았지만 폭력성을 뒤에 숨기고 있는 사람. 그런 사람들을 지나오면서 지금의 희진은 도무지 발을 떼기 어려운 날을 보내고 있었다. 신발과 양말 안에 들어찬 모래가 조금만 움직여도 발끝을 괴롭히듯. 희진은 이미 그의 손에 깍지가 껴진 채 꿈틀거리는 자신의 손가락과, 그의 손가락을 번갈아 쳐다본다.
“만져 봐도 돼요?”
희진은 눈앞에 있지만 보이는 걸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의 얼굴을 손끝으로 더듬으며 느껴본다. 그의 뺨과 입술에 좀 전의 달콤했던 고백이 녹아내린 흔적이 있는 것 마냥 꼼꼼히 훑어본다. 지금의 떨림을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런 기분이 들면 분명 행복한 거라 누구든 기뻐할 텐데, 희진의 뺨에는 눈물이 흘러내린다. 안아줄까요? 라는 그의 말에 그녀는 그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는다. 그의 가디건 끝자락을 만지작거리며 희진, 눈물을 그치려고 한다.
이것 봐. 나는 무서워서 도망치고 싶어. 도망치려는 나를 내가 붙잡는다. 떨지 않아도 돼. 진짜인지 가짜인지 넌 알게 될 거야. 그리고 언제까지나 도망치지 않아도 돼. 더 이상 상처받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이젠 편안하게 걸어가 보라고.
희진은 마음을 가로막는 능선을 넘어서 가보리라고 남몰래 다짐한다. 눈물을 훔치며 다 울었다며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이다 그 순간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을 보게 된다. 그 눈빛 속에서 깊은 바다, 심해에서 느끼는 고요함이 느껴진다. 파도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바닷속에서의 편안한 상태.
둘은 깍지 낀 손을 끌어당겨 서로를 꼭 끌어안는다. 차를 덥히는 히터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가 그 둘을 아득한 심해로 끌어당긴다. 여러 날 내리고 있는 싸리 눈도, 흐린 날씨와 불안감도, 왠지 아무런 쓸모가 없이 느껴져서 다시 시작하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