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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최 Jul 09. 2022

Between the Bars

#습작/단편소설

포장마차의 실내는 어둡고 침침하고 음울했고, 또 그런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야, 그만 마셔.”

학고가 날 타일렀다.

“내버려 둬. 삶은 축제야. 즐겨야지.”

“그러다 내일 아침 후회하지.”

“마음껏 즐겼다면 후회는 없겠지. 지금은 축제고, 축제는 즐기라고 있는 거야. 그렇다면 후회는 없어.”

“어휴, 지랄 염병.”

“자네가 지랄 염병으로 매도해도 마지막까지 내 편인 건 내 마음뿐이라네.”

“나중에 나 원망하지 마라.”

“아니. 난 자네를 원망할 거야.”

학고의 비웃음과 우울한 소음이 달팽이처럼 귓바퀴에 감겨 들어왔다. 마치 달팽이 한 무리가 연주하는 실내악 테이프가 늘어난 것 같았다. 달팽이가 떠오르니 골뱅이가 먹고 싶어졌다. 난 살아 있는 골뱅이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골뱅이를 고춧가루에 버무려진 몰골이 아닌 살아있는 존재 자체로 대할 기회가 없었다는 사실이 슬퍼졌다. 하지만 골뱅이가 내게 음식 아닌 존재 자체로 다가오기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나 골뱅이나 서로를 이해해야 했다.

“이봐, 내게 골뱅이 한 접시를 선사해 주겠나?”

“배고프냐?”

“골뱅이는 어떤 존재일까 궁금해졌네.”

“이모! 여기 골뱅이 하나 주세요.”

“삶은 거, 무친 거?”

난 심연에서 길어 올린 답을 했다.

“삶.”

“제시카! 여기 삶은 골뱅이 하나!”

“서비스 정신을 발휘해서.”

“국물 많이!”

난 국물이란 말에 울컥해서 내뱉었다.

“국물의 부피는 여백의 미로만 삼아 주시오.”

“그럼 한 폭의 수묵화를 담아 주마.”

“아니, 그렇다면 골뱅이로 여백의 미를 장식한 문란한 안주로 부탁하오.”

학고는 한숨을 쉬었고 마담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곧 삶은 골뱅이 한 그릇이 내 앞에 척 놓였다. 국물이 두어 방울 내 소매에 튀겨 여백의 미를 전염시켰다. 한순간 그를 노려보려 했지만 그에겐 미간에 뚫은 피어싱과 손목에서 팔꿈치로 전진하는 용 문신이 있었다. 제시카가 불량스런 남자 이름일 수도 있다는 걸 알고 나니 골뱅이가 그저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국물은 딱 내가 예상했던 부피만큼 차 있었다. 서비스 정신과 배급의 중간노선. 왠지 제시카의 불량스러움을 납득할 수 있었다.

학고는 옆 테이블에 앉은 혼자 온 여자에게 작업을 거는 터라 난 안중에도 없었다. 사실 학고보다 내가 먼저 그 여잘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날 지켜봐 준 사람이 없어서 증명할 방법은 없었다. 처음 그녀는 다이어리를 꺼내서 뭔갈 적고 있었다. 그러다 금세 덮고는 일기장 같이 생긴 노트를 꺼내 또 뭔갈 적어 댔다. 그러더니 이번엔 DJ 앞에―샹송을 선곡하는 DJ가 있는 낭만적인 포장마차였다. 학고는 이런 곳들을 잘 알고 있었다― 비치된 메모지와 연필을 집어 그림을 그렸다 글자를 썼다 박박 지웠다 하며 수선을 떨었다. 그러는 중간중간 테이블이나 벽 모서리 같은 곳에 쓸데없이 ‘사랑하지 않아,’ ‘맥주가 쓰다’ 따위의 낙서를 하기도 했다. 학고는 그녀의 선명한 낙서를 전혀 알지 못하리라. 저 여잔 낙서를 하기 위해 오늘 이곳에 온지도 모르는데.

“축제를 즐겨요!”

난 골뱅이 그릇을 바라보며 그녀에게 외쳤다. 머릿속에 여자 꾈 생각뿐인 학고 같은 부류와는 달리 난 그녀의 외로움을 알고 있었다.

“뭐?”

“자넨 몰라도 되네.”

난 학고를 가뿐히 무시했다. 모자란 인간 같으니. 그녀는 날 한번 힐끗 쳐다보곤 도도한 척 고갤 돌렸다. 하지만 마음은 이미 나에 대한 흥미로 가득 찼을 것이다. 학고 따위가 아무리 작업을 걸어도 그녀의 마음속엔 점점 내가 가득 들어찰 것이다.

애인 등 뒤로 잡는 축축한 손의 감촉마냥 난 그녀와 나만의 은밀한 소통을 즐기며 껍질 속에 웅크려 있는 골뱅이를 쑥 뽑았다. 알몸이 드러난 삶은 골뱅이는 한입에 쏙 들어와 질겅질겅 씹혔다. 삶은 골뱅이. 난 언어유희를 떠올렸다. 삶=골뱅이. 이것은 껍질 속에 숨어 사는 나약한 현대인의 자화상. 소실점으로 빨려 들어가는 인생의 미궁.

“마담.”

“제시카, 이 분 국물 더 드려라.”

“아, 그런 의도는 아니었소만 감사하오.”

난 마담의 후덕한 인심에 감탄하며 돌아서려던 제시카를 붙잡아 사발을 건넸다. 그리고 마담에게 물었다.

“왜 끓는 물에 넣고 가열하는 것을 삶는다고 말하게 되었을까?”

“그게 왜?”

“…무엇이?”

“골뱅이가 맛이 없니?”

“아니오, 삶은 골뱅이는 아주 만족스럽소.”

“그럼 드쇼.”

마담은 쌩하니 내 주변을 떠났다. 추가 주문이 없는 한 다신 이 근처에 오지 않겠다는 태세로. 난 고갤 절레절레 흔들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도무지 대화를 할 수가 없군. 그 말을 들었는지 학고가 여자에게 추파를 던지다 말고 날 보며 피식 웃었다. 마치 삶은 골뱅이 따위 괘념치 않는 자신이 더 우월하다는 듯.

난 혼자서 진창으로 취해 버렸다. 예상과 달리 학고는 결국 그 여자를 꾀어낸 모양이었다. 학고 같은 놈에게 넘어간 그녀에게 실망해 난 연신 나발을 불며 골뱅이 국물로 입을 헹궜다. 인생 고락을 다 아는 듯한 낙서를 끼적이더니만. 난 어지럼증을 가라앉히느라 바에 엎드렸다. 아무도 날 신경 쓰지 않았다. 마담이 제시카에게, 제시카가 학고에게 언질을 준 후에야 그녀와 바짝 붙어 다음 행선지를 정하던 학고가 내 쪽을 돌아보았다.

“야, 정신 차려.”

학고의 어깨 뒤로 비죽 쳐다보는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골뱅이처럼 삶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가령. ‘이를 테면 연애 따위를 하고 싶다는 말이다.’에서 ‘이를 테면’과 치환할 수 있는 바로 그 부사였다. 일부러 엿들은 건 아니고 학고와 통성명할 때 그녀가 ‘가령, 가령이라고!’ 하며 포장마차가 떠나가라 외쳤던 탓이다. 아마 이곳에 있는 모두가 가령이란 이름을 알았을 것이다. 여기서 가장 멀리 떨어진 음침한 구석자리의 커플도 ‘그녀의 이름은?’ 하고 물으면 입을 후루룹 추스르며 ‘그야 가령이죠.’ 하곤 남은 키스를 마저 할 것이다. 하물며 가까이 있던 내가 가령이란 이름을 듣지 않을 순 없었다.

학고와 가령은 엎드린 날 두고 저들끼리 귓속말을 주고받으며 키득댔다. 제시카나 마담이나 학고나 가령이나 모두 실망스런 군상이었다. 포장마차 이름처럼 ‘샹’스러웠다. 몸을 일으켜 억지로 담배를 물자 학고가 낚아챘다.

“담배 피우면 더 취해.”

난 그 말이 제 담배 아깝다는 소리란 걸 알고 있었다. 자잘한 인간 같으니. 있는 놈들이 더한다고 학고도 꼭 그 짝이었다.

“그렇다고 뭘 뺏어? 물었으면 놔두지.”

놀랍게도 그건 가령의 말이었다. 아, 그녀는 나의 욕구를 인정하고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 친구의 욕구를 충족시킬 담배 한 대를 아까워하는 학고의 자잘함을 눈치 채고 퉁을 준 것이다. 그것도 정곡을 교묘히 피해 가는 완곡하고 능란한 표현으로. 참으로 통쾌했다. 가령은 학고에게 진심으로 넘어가지도 않았거니와 생각보다 머리가 빈 여자도 아니었다. 자, 어쩔 텐가. 그녀는 자네에게 반하지 않았어. 그 말이 목까지 치밀었지만 난 인내심을 발휘해 눌러 삼켰다. 담뱃대를 단숨에 낚아챈 학고에 비하면 황송할 만치 신사적인 처사였다. 그는 그런 배려를 받는 줄도 모를 테지만.

포장마차를 나와 함께 택시를 잡았다. 학고와 가령은 자연스럽게 뒷자리에 탔고, 멈칫한 난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다는 듯 자연스레 보조석에 올랐다.

“너네 집부터 찍어.”

그런 말을 내게 던져놓고 저들끼리 말장난을 주고받는 학고와 가령을 돌아보며 생각했다. TV에서 보면 늘 VIP가 뒤에 타잖아. 난 관대하게 그들에게 뒷자릴 양보한 거야. 사실 앞자리가 시야도 탁 트여서 좋지. 기사님께 자세히 길을 안내해드릴 수도 있고 말이야.

그런데 왜 가령이 아닌 내 집부터 찍나.

뻔했다. 엉큼한 속셈인 게지. 난 학고의 불순한 의도를 굳이 짚어내지 않으면서도 가령의 위기를 모면시켜 줄 방법을 고민했다. 내가 내리고 나면 그녀는 집으로 가는 줄로만 알다가 학고에게 봉변을 당할 것이다. 학고는 그러고도 남을 불한당 같은 놈이었다. 불쌍한 그녀를 구해 줄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난 일단 가령에게 말을 걸기로 마음먹었다. 이 밤에 날씨 얘길 할 순 없으니 뭔가 질문을 하는 게 적당했다. 궁금해하는 게 이상하지 않을, 그리고 그런 질문을 하는 내게도 궁금증이 생길 만한 질문을.

“가령 씬 꿈이 무엇이오?”

“저요? 꿈이요?”

쿡 하고 코웃음 치는 학고에게 눈길도 주지 않으며 난 재차 물었다. 가령은 실없이 웃으며 꿈이 없다고 짤막하게 답했다. 그 웃음은 꿈을 앗아갈 정도로 암울했던, 그러나 이젠 부질없어진 과거의 어느 한 시점을 회상하는 것 같았다. 생각하고 답할 시간을 주며 기다렸지만 추가 설명도, 되돌아오는 질문도 없었다. 그게 대화가 끊긴 거란 걸 깨달은 난 당황해서 다른 질문거릴 떠올렸다. 이상하지 않으면서도 되물을 수 있는… 갑자기 화제를 바꾸긴 뭐하니 꿈과 관련된 무언가를…. 그때 차가 골목을 비집고 들어가며 내비게이션에서 안내 음성이 흘러나왔다. ‘100미터 앞에 목적지가 있습니다.’

“혹시 인형의 꿈이란 노래 아시오?”

먼 곳만 보는 그대를 바라보는 인형이 바로 나라는 숨은 뜻을 그녀가 단번에 알아채긴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가령은 가타부타 반응이 없더니 학고에게 수군댔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비좁은 차 안이라 어쩔 수 없이 다 들렸다. ‘쟤 왜 저래?’ 학고는 찔려서인지 뭐라 말은 못하고 무시하란 듯 고갤 저었다. 제 체면 생각해 돌려 말하는 내 수고는 생각 않고 오히려 내게 덮어씌워 모면하려는 꼴이라니. 내가 차에서 내린 뒤 어떤 일이 벌어질지 그녀에게 확 불어 버리고 싶었다. 말할까 말까, 말할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내비게이션 음성이 들렸다. ‘목적지에 도착하였습니다. 안내를 종료합니다.’

내 말 한마디면 가령은 당장 차에서 내려 새 택시를 잡고 집에 쌩 가 버릴 것이다. 하지만 학고는 내 오랜 친구였거니와 내가 모든 여자의 기사가 되어 줄 순 없는 노릇이다. 더욱이 오늘 처음 본, 꿈도 없다는 가령에게는 말이다. 난 그렇게 그녀를 평가절하하며 책임을 덜기로 했다.

“안 내려?”

“조심히 들어가게. 가령 씨도 조심히, 들어가시오. 집으로 곧장.”

“안녕히 가세요.”

난 차에서 내려 미적미적 뒷걸음치다가 황급히 달려와 출발하려는 차를 세웠다. 택시가 덜컹 서더니 창문이 지잉 열렸다.

“왜? 뭐 두고 내렸어?”

난 흘끔 앞좌석의 내비게이션을 보았다. 아무 목적지도 입력돼 있지 않았다. 확실히 학고는 가령을 집에 데려다줄 의지가 없었다. 난 그녀에게 귀를 가져오라 손짓했다. 그냥 말하라는 가령을 기어코 끌어온 난 그 귀에 속삭였다.

“먼저 가는 걸 사죄하오. 다시 말하지만 곧장 집으로 가시오.”

“네네. 들어가세요.”

멀어지는 차의 후미등을 바라보며 난 그녀의 안위를 빌었다. 가령이 내게 고마워할 일이 생기지 않길 바라며. 아니, 사실은 학고의 본색에 진저리치며 뛰쳐나와 뒤늦게라도 나를 찾아오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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