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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최 Aug 13. 2022

고도의 왈츠 #1/6

#습작/단편소설

여자 친구들은 간혹 연인처럼 이별을 고한다. 이별은 종종 갑을관계를 빚어내는데 이때 갑은 하나의 원칙을 따른다. 무성의. 이를테면 인터넷 메신저로 창을 띄우고 단어 몇 개를 타이핑하는 식이다. 이 단어들은 최소화되어 있고 최적화되어 있다. 일차원적이면서 핵심만을 겨냥한다. 모든 이별 통보가 공통으로 갖는 한 점의 교집합이자 원형. ‘그만 보자.’ 더 쉽고 간결한 게 있다면 그것이 선택될 것이다. 을은 저 역시 ‘왜’라고 쉽고 간결하게 묻는다. 하지만 그건 자신도 무성의해 보이기 위해 애써 요약한 것이다. 갑은 대답이 없고 대화창에 무의미한 ‘왜’의 변주가 계속 올라온다. 갑은 대화창을 닫고 을을 삭제한다. 둘 관계는 끝난다.

영을 알고 지낸 7년을 단 며칠 만에 모두 되짚었다. 나는 내내 을이었다가 이별하는 순간에만 갑이었다. 뱃속에서 독극물처럼 합리화가 부대꼈다. 이해받지 못하겠지. 내 탓이 되겠지. 뻔한 결론. 난 죄의식의 빌미를 낱낱이 제공받기 싫었다. 구차한 설득도 귀찮았다. 그저 빨리 이 짓을 끝내고 싶었다. 대충.

“손 약간만 내려 봐요.”

난 영과의 이별을 일방적이고 독단적으로 치렀다. 대충. 성의 없이.

“아니다, 그냥 다시 올려요.”

고도는 내가 영에게 헤어짐을 통보하던 말투로 자세를 주문했다.

단조로운 시간을 타고 칼라 브루니의 곡이 흘렀다. 칼라 브루니를 들으니 영다방의 그가 생각났다. 예전에 다니던 회사 근처의 카페였다. 당시 난 동료들에게 왕따를 당하던 터라 점심시간을 늘 그곳에서 혼자 보냈다. 그때마다 칼라 브루니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종업원에게 가수 이름을 묻자 그는 같은 CD가 두 개 있다며 하나를 선물로 주었다. 앨범 이름은 <Comme Si De Rien N'etait>. 번역하면 ‘마치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그 뒤로 난 조금 더 자주 그곳을 찾았고 종국에 그 종업원 조와 짤막한 연애도 했다. 조와 헤어진 후엔 더 이상 그곳을 찾지 않았다. 헤어진 이유는 간단했다. 그는 혼자 카페에서 커피를 즐기는 여인을 좋아했고 난 칼라 브루니를 선곡해 놓고 지켜봐 주는 남자를 좋아했다. 그와 난 서로의 일부를 좋아했지만 가까워질수록 그 일부마저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잠깐 쉴게요.”

저 사람의 이름은 고도. 프리다 칼로의 <부서진 기둥> 오마주 작품을 준비하는 화가다. 이곳은 그의 작업실이고 난 그의 모델이다. 난 상반신에 깁스코르셋을 하고 벤치에 앉아 그가 보고 그릴 원형을 제공한다.

인터뷰를 하러 처음 왔을 때 그는 백치 같고 무례했다. 그는 문틈으로 눈을 뒤덮는 축축한 머리를 내밀고 멀뚱히 날 쳐다보다가 가까스로 약속을 기억해 냈다.

‘아, 모델이에요?’

‘네, 인터뷰하러 왔어요.’

그는 무례하게 내 손목을 덥석 잡고 안으로 이끌었다. 고도는 내 몸 여기저기에 백열등을 쬐어 보며 속눈썹 그림자까지 꼼꼼하게 확인했다. 내복 차림으로 온종일 농락당하다 내빼기 일보직전에 OK가 떨어졌다. ‘5주. 주 1회. 낮 2시부터 저녁 6시. 상반신 누드. 기구 착용. 작품 알죠? 깁스코르셋인데 불편해요. 아프진 않아요. 페이는 이백. 적어요?’ 금액이 적은가를 먼저 묻는 그는 부잣집 망나니 도련님 같았다. ‘더 줄 수도 있어요?’ 하고 묻자 ‘나야 뭐 청구서 쓰면 될 일이라.’ 하는 대답이 왔다. 후원자가 있다는 소문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기구 제작을 위해 신체사이즈를 잴 때 고도의 손이 민감한 곳을 몇 번 스쳤다. 덕분에 난 내내 어깨 근육이 곤두서 있었지만 그는 무신경했다. 아무 의도도 없는, 백치처럼 아무것도 조심하지 않는 손길이었다.

오늘은 첫날이었다. 연필로 스케치를 하던 고도는 짜증스런 표정으로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 허리 뒤에 대충 맨 앞치마 끈을 보며 난 혼자서 두 팔을 뒤로 뻗어 동여매는 모습을 상상했다. 난 그런저런 상상이라도 하며 시간을 보내야 했다.

“쉬는 시간에도 이러고 있어야 돼요?”

“정확히 같은 위치에 같은 자세로 복귀할 수 있어요?”

“아뇨.”

“그냥 있어요.”

그는 뒤통수로 대충 대답했다. 고고학자 같았던 처음의 열정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급속도로 기운이 빠져 가며 내 자책감을 자극했다. 벗겨 보니 형편없군 따위의 환청이 들렸다. 그는 두 시간 만에 작업에 의욕을 잃었다.

“잘 안 돼요?”

“네.”

“뭐가요?”

“말하면 알아요?”

“안 하면 모르죠.”

“느낌이 안 맞아요. 맞을 줄 알았는데. 모델이 프리다가 아니니 당연한 거지만.”

“제 탓인가요?”

“그럼 뭐 때문이겠어요?”

네가 형편없는 화가라는 생각은 안 드니. 한순간 치가 떨려 목울대까지 파르르 떨렸다. 커피를 들고 돌아선 고도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할지 알지만 자신은 내 생각 따위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자신은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참아. 어차피 예술가는 다 괴질 환자들이라고. 난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몸이 부서져 본 적이 없어서 프리다가 될 순 없겠네요.”

“부서져 보면 될 것 같아요?”

고도는 지긋이 날 바라보았다. 척척한 눈빛이 한번 부서져 보라고 하는 듯했다. 머리, 목, 어깨, 팔, 허리, 골반, 다리를 따라 음모를 꾸미는 시선이 훑어 내려왔다. 눈 밑이 폭력성으로 퀭하게 물들었다. 그는 페인팅 나이프 하나를 꼬나들고 성큼성큼 다가와 나이프 끝으로 내 턱을 치켜 올렸다.

“부서진 몸은 프리다의 예술성이 발휘되던 장소일 뿐이지. 너와 난 아무리 만신창이가 돼도 프리다가 될 수 없어요.”

덕분에 턱에 물감이 묻었다. 하, 이 어린애를 어쩐담. 이 말이 목까지 올라왔지만 뱉진 않았다. 작가님 심사를 건드리면 안 되지. 손에 같잖은 나이프도 들려 있는데. 지금 자신이 굉장히 위험한 야수처럼 보인다고 생각할 텐데 터프한 왕자님의 동화를 지켜 줘야지.

고도는 그런 내 생각마저 모조리 읽은 표정으로, 그런 조롱과 비아냥과 어린아이 다루듯 내려다보는 눈빛은 이미 익숙하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부서지긴 개뿔.”

그는 나이프를 내팽개치며 돌아섰다.


골목을 나와 빠르게 걸었다. 상점들이 똑같은 유행가를 길거리에 질펀하게 쏟아부었다. 2차선 도로를 무단 횡단할 때 벤츠 한 대가 급정거하며 경적을 내질렀다. 그 틈에 하이힐을 신은 여자가 딱딱 거리며 길을 건너 달아났다. 교차로 인파 속에서 연이어 뒷사람에게 구두 뒤축을 차였다.

증오할 대상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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