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주는 사람의 슬픔 & 감정 민주주의의 부재
두 사람 모두 같은 아이를 잃은 같은 슬픔을 겪고 있지만, 그 슬픔을 표현하고 해석하는 방식의 차이가 있다. 관계 안에서 감정의 권력 구조를 만들어내고 있다.
영화 <릴리와 찌르레기> 릴리가 아이의 물건을 정리하고, 잭과 교감하는 그 조용하고도 깊은 순간 장면.
릴리: 당신이 돌아오면 호수에 놀러 가자
잭: 그래 ,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가자
릴리: 나는 그런 말 안 했어.
잭:알아, 내가 입원한 이유가 그러잖아.
착한 과거의 내 모습으로 돌아가서
다시 내 삶을 사는 것
릴리:시간이 더 걸릴 뿐이야
잭: 당신은 시간이 다 해결해 줄 것 같아? 우리 관계도?
릴리: 그게 아니라, 여기서 멈춰 있을 순 없다는 거지, 그건 안 좋아.
잭:알아, 내 자리가 어디인지 모르겠어
우리 관계는 또 어떻고,
모든 게 불확실해, 난 당신과 달라.
릴리: 나와 다르다고?
내 뱃속에서 9개월이나 품은 애였어.
왜 당신이 여기 있어?
잭: 분명 나는 먼가 할 수 있었는데. 편하게 잤어
아직도 아침에 눈을 뜨면 애가 우는 소리가 들려.
가슴 찢어지게 아픈 순간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야
제발 부탁인데 시간이야기는 꺼내지 마.
릴리: 케이티 물건 모두 버렸어. 아기방을 어떻게 할지 몰라서. 방법이 없어서.
잭: 그만 가줘
릴리: 먼저 물어봤어야 했는데. 미안해.
잭: 가줘
감정의 정치적 구조로 본 이 장면의 의미
잭은 침묵과 자기 비난을 통해 슬픔을 ‘소유’한다. 그는 가슴 찢어지게 아픈 순간이 가장 행복했다 고 말하며, 고통을 감정의 정당성으로 삼고 있다.
반면 릴리는 감정을 말로 풀고, 관계를 회복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하지만 그 감정은 잭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감정의 ‘해석권’을 잃은 채 주변화된다.
릴리는 “방법이 없어서” 아기방을 정리했다고 말하지만, 잭은 그 행위를 기억의 배신으로 받아들이고, 그녀의 슬픔을 정치적으로 무효화시킨다.
이때 릴리는 단지 슬퍼하는 사람이 아니라, 상대의 감정을 들어주는 역할에 고정된 감정의 하위 주체가 된다.
감정의 민주주의가 무너진 순간
잭은 “시간 얘기 하지 마”라고 말하며, 감정의 시간조차 통제하려 하고, 이는 감정의 흐름이 한 사람의 방식에 종속될 때 발생하는 권력의 작동을 보여준다.
릴리는 “먼저 물어봤어야 했는데, 미안해”라고 말하며 다시 관계를 위하여, 자신의 감정을 정당화받기 위해 사과한다. 이건 감정의 평등이 무너진 구조에서 흔히 나타나는 감정의 자기 검열이다
왜 같은 슬픔을 겪고 있어도, 누구의 감정이 더 ‘진짜’로 여겨지는가에 따라 관계는 감정의 위계와 침묵의 질서로 흘러야 할까?
이 장면은 단순한 갈등이 아니라, 감정의 주도권을 둘러싼 정치적 충돌이다.
릴리는 더 이상 ‘들어주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도 말할 수 있는 주체로 회복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