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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챗쏭 May 24. 2019

여행의 기념품, 무엇으로 기억하시렵니까

내가 고른 여행의 기념품



당신의 여행을 함께 할 필수품은 무엇인가.

나는 여행을 함께할 책을 고르는데 무척 신경을 쓴다. 왜냐하면, '낙장불입'이기 때문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 준비하는 것 중, 내가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것 하나가 있다.


바로 여행 중에 읽을 책이다.

여행 중에 읽을 책을 고르는 것에는 나름의 원칙이 있다.


일단, 한 권이어야 한다. 가능하면 짐을 줄여 떠나고 싶어 하는 나는, 여러 권의 책을 넣을 짐칸을 마련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한 권이, 가능하다면 여행의 의미를 담아낼 수 있으면 좋겠다. 


한 줄이든, 두 줄이든, 여행에 가져간 그 책에서의 한 구절을 여행과 함께 떠올릴 수 있게 된다면, 나는 그 책은 제 값을 다했다고 생각한다.(전자책을 심각하게 고려한 적이 있다. 그럼에도 그 한권의 종이 넘기는 맛을 포기할 수 없었다.)


2014년, 동갑내기 동기들, 남자 넷이서 떠난 터키 여행에 함께한 책은 오소희 작가의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겠지」였다. 


에게해를 마주하는 욜루데니즈의 해변에 누워 읽은 터키 여행기는 나의 여행을 살아있게 했다. 작가가 어린 아들과 함께한 비포장도로와 같은 터키 여행기는 네 남자의 투박한 여행을 더욱 의미 있게 만들었다.


2016.가을. 제주 세화에서


2016년 가을, 우리 가족의 제주여행에 함께한 책은 김민철 작가의 「모든 요일의 여행」이었다."대단한 무언가를 보기 위해 떠나온 것이 아닌, 어쩌면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아무것도 아니지 않게 여기게 되는 그 마음"을 함께 하게 한 이 책은 우리의 여행을 "지금 여기서 행복"하다고 느끼게 했다.


2017년 가을에는 방콕과 끄라비로 열흘의 가족 여행을 떠났다. 한수희 작가의 「여행이라는 참 이상한 일」이란 책을 옆에 끼고.


"누울 줄 아는 것. 누워 있는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여행은 오래도록 책과 함께 끄라비를 떠올리게 했다.

2017. 가을. 끄라비에서. 한수희 책, 여행이라는 참 이상한 일



이번 스페인 여행을 떠나기 전 한참을 고민했다. 적당한 책을 쉽게 고르지 못했다. 가족과의 첫 유럽여행에 너무 큰 의미를 둔 탓이었던가. 여행 출발이 이르러서야 아내가 던지듯 건네 준 책, 김연수 작가의 「언젠가, 아마도」를 챙겨 넣었다.







김연수 작가의 연필 세자루

모든 것을 살 수 없다면, 그럼 무엇을 살 것인가




이 책의 한 꼭지.


작가는 소설이 러시아에서 번역된 것을 계기로 러시아 여행을 하게 됐다. 주관사 측에서 꼭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참고할 수 있도록 알려달라고 했는데, 작가는 '꼭 한번 문구점에 들러 달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작가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고 한국어를 가르치는 가이드가 나왔는데, 스쳐 지나가는 건물을 소개하다가, 어느 광장 앞에서,


"저기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큰 문구점입니다." 이러더란다. 이어 도시의 건물을 소개하다가,


"저기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두 번째로 큰 문구점입니다."이랬다고 한다. 작가를 위해 준비한 노력에 뿌듯한 웃음을 지었다는 이야기.


작가가 문구점을 찾게 된 것은 도쿄에 갔을 때의 일 때문이었다. 12층 건물이 통째로 문구점인 곳을 갔는데, 모든 것을 사고 싶었지만, 무엇을 살지 고민이 되더란다.

                                         

모든 것을 살 수 없다면, 그럼 무엇을 살 것인가? 그건 마치 인생의 질문처럼 느껴졌다.

모든 삶을 살 수 없다면, 그럼 어떤 삶을 살 것인가?

그래서 나는 연필을 사기로 했다.

연필은 내게 가장 겸손하면서도
가장 큰 변화를 이끄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아마도'(컬처그라퍼), 김연수.(67쪽)

                                               

그렇게 작가가 문구점에서 골라 산 것은 연필 세 자루였다.







우리 여행의 기념품

모든 것을 살 수 없다면, 나는 '소주잔'을 살 것입니다.



우리는 여행지에서 '기념품'이라는 것을 산다. 어디에 가면 무엇은 꼭 사야 돼 하는 쇼핑 목록도 있겠지만, 여행에 가면 습관처럼 골라오는 몇 가지의 것들이 있다.


우리 가족의 여행에는 '냉장고 자석'이 그것이다. 이것은 아내의 몫이다. 고르고 골라 꼭 마음에 드는 것을 하나를 집어든다. 무게도 부피도 많이 차지하지 않기 때문에, 맘에 드는 것이 있다면 여러 개 골라도 부담이 없다.



이번 스페인 여행에서는 돌아다니는 도시마다 한두 개씩 골라 넣었다. 마드리드에서는 아토차역 기념품 가게에서 하나, 톨레도에서는 톨레도 대성당 앞의 기념품 가게에서 하나, 세고비아에서는 수도교 앞의 기념품 가게에서 하나.


바르셀로나에 가서는 발길이 닿는 곳마다 사댔는지, 람블라스 거리, 성파밀리아 성당, 구엘공원, FC바르셀로나의 캄프누 경기장까지. 곳곳에서 산 대여섯 개의 자석이 색색마다 다르게 붙어 있다.



아내의 '기념품'은 냉장고 자석이었지만, 나의 기념품은 따로 있다. 호텔의 연필이다.


국내여행이든 해외여행이든 숙소에 있는 연필은 내게 기념품이 된다. 간혹 메모지를 함께 가져오는 경우도 있다. 생각해보니 '절도행각'의 다름 아니기도 하다. 주인이 가져가라고 한 적도 없고, 가져가도 되는지 물어본 적도 없었으니 말이다. 그간 마음의 짐이 조금 있었는데, 김연수 작가의 책을 읽다가 무릎을 탁 쳤다.


"호텔 연필을 가져올 때는 내가 가진 여분의 연필과 바꿔놓는 것이 마땅한 예의라 그렇게 했다."

(나 같은 사람이 또 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다음 여행에 챙겨야 할 것이 생겼다. 모나미로 할 것인지, 동아로 할 것인지 고를 몫이 남았을 뿐.


우리의 '기념품'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톨레도 대성당 앞의 기념품 가게에 아내 혼자 들어갔다. 좁은 가게 안에는 이미 한국인 단체 관광객이 우르르 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내가 빈손으로 나오더니, 두 눈을 크게 뜨며 호들갑을 떤다.

소주 한잔에 '세고비아'를, 소주 한잔에 '마드리드'를, 소주 한잔에 '헬싱키'를 추억할 수 있게 됐다.



"여보, 여보, 기념품 대박인거 있어."

"뭔데?"

"소주잔"

"소주잔? 여기에 소주잔이 있다고?"


"응, 저 안에 있던 한국 사람 중에 자기는 꼭 외국에 나오면 소주잔을 산다는 사람이 있더라고. 여기서도 골랐는데, 내가 보니까 엄청 이뻐. 우리도 하나 사자."


처음에는 흘려 들었다. 나를 술의 범주로 구분하자면, 애주가에 속한다 하겠지만, 소주잔을 골라 모아 놓을 만큼의 애주가라 할 수는 없었다. 아내는 더욱이. 술이라면 알코올 한 방울 입에 넣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하나를 사놓고 보니, 몇 개가 나란히 있는 모습이 연상되었다. 마드리드에서 하나, 세고비아에서 하나, 경유지였던 헬싱키에서 하나. 그렇게 세 개를 모아 왔다.


또 있다. 스벅의 텀블러.

스타벅스가 세계 곳곳에 있다 보니 가는 도시마다 호기심 삼아 들러본다. 커피 맛을 비교해보기도 하고 커피 값을 놓고 우리보다 싸네, 비싸네 따져보기도 한다.


2년 전 태국여행에서는 화사한 색이 이쁜 텀블러를 하나 사고 싶었다. 기념품으로 치자면 꽤 괜찮은 것이었다. 작년 친구와 둘이 간 오사카에서는 아내에게 줄 선물이랍시고 하나 샀다.


이번에도 마드리드에서 하나 골랐다. 생각해보면, 그것으로 커피를 마실 것도 아니고 모아 놓으면 부피를 많이 차지할 것이었는데도, 거기에 쓰인 도시명은 '나 여기에 다녀왔소, 그것도 스벅 말이요.' 하기에는 딱이었다.




여행에서 수집될 수 있는 기념품은 나름의 공통점이 있다.


첫 번째는 어느 여행지에서도 있는 기념품일 것.

두 번째는 간 곳의 이름이 선명할 것.(어디에서 산 것인지 분명히 알 수 있게 할 것)

세 번째는 부피가 많이 차지하지 않을 것.

선택적이지만, 네 번째는 가격이 비싸지 않을 것.


여행을 기억하는 많은 방법이 있다. 사진을 찍기도 하고 여행기를 남기기도 하고. 기념품을 사거나 물건을 사 오기도 한다. 김연수 작가의 말처럼, 모든 것을 다 살 수 없다면 무엇을 살지 선택해야 한다.


여행을 기억하는 것도 그렇다. 여행의 모든 것을 다 남길 수 없으니 여행의 무언가를 선택해야 한다. 이것은 여행의 계획에서부터 생각할 문제다. 여행의 모든 것을 다 누릴 수 없다면, 무엇을 누릴 것인가.


어느 여행지를 가도 누릴 수 있는 것이고, 다녀온 곳의 흔적이 선명할 수 있으며, 선택적이지만 여행의 비용이 부담되지 않을 것이라면, 그런 여행을 누린다면 어떨까. 기념품을 골라오듯 말이다.


우리는 무엇을 선택했을까.





 "홀짝"하고 순식간에 들이마시는

'아이스커피' 같은 여행보다도,

적당히 식기를 기다려,

한 모금 "츄릅" 입에 담아,

혀가 커피의 쓴 맛을 채 느끼기 전에,

쌉싸름한 커피 향이 코에 먼저 닿고,

맛이 입에서 다 가시기 전에,

따뜻함이 뱃속에 은은히 퍼지는,

그런 여행이 되길 바라.


천천히, 천천히 말이야. 은은하게.


짜릿하게 퍼졌다가 사그라지는,

한 여름 속 '아이스커피' 같은 것 말고,

다음에 어느 '일상'에서 그 맛과 향이 은은하게 떠오를 그런 여행.


그런 선물 같은 여행이 이제 시작될 거야.


2019. 1. 20. 마드리드행 비행기 안에서의 메모 중



톨레도, 도시를 둘러 흐르는 타호강




이 글은 아래의 글과 함께 읽으시면 좋습니다. 단, '작가챗쏭'에게 빠져들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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