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직에서 주로 실무를 챙기는 사업지원팀에 있다. 수많은 보고서와 계획서, 자료의 숫자들 속에 파묻혀 있다 보면, 자주 잊는다. 우리가 왜 이 일을 하는지. 그럴 때면 어김없이 내 마음속에 다시 살아나는 장면이 있다. 강도를 만나 쓰러진 사람을 두고 지나쳐간 사제와 레위인, 그리고 그 곁에 멈춘 한 사람—사마리아인.
요즘 우리 팀의 주된 관심은 ‘거룩함’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우리의 일상 속에서 다시 풀어낼 수 있을까 하는 데 있다. 행정적 효율, 재정적 투명성, 프로그램의 성과도 중요하지만, 결국 우리가 사회복지라는 이름 아래 모인 이유는 사람과 사람 사이,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 무엇보다 고통받는 이들과의 거리감을 줄이기 위함이 아닐까.
예수님의 시대, 유다인들은 정결을 중시했다. 그들에게 거룩함이란 경계를 지키는 일이었다. 죽음에 가까운 것, 타 민족, 율법 밖의 모든 것들은 부정한 것이었다. 그래서 사제도, 레위인도 강도 만난 사람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침묵은 율법적이었고, 질서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반대편에서 거룩함을 새롭게 정의하셨다.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한 줄의 이 문장이 모든 것을 뒤집는다. 함께 아파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이 예수님이 보신 거룩함이었다. 차가운 율법의 기준보다 따뜻한 감정의 움직임을 더 거룩한 것으로 선언하셨다.
업무보고를 하면서, 혹은 예산 배정을 고민하면서 나는 자주 선택의 기로에 선다. 효율과 기준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인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내게 묻는다. 지금 너는 누구의 편에 설 것인가. 사제인가, 레위인인가, 아니면 그 자리에 멈춘 사마리아인인가.
‘함께 아파하기’는 단지 감정적 연민이 아니다. 그것은 경계를 넘는 용기이고, 자신을 내려놓는 결단이다. 우리가 돕는다는 이름 아래 상대방을 판단하지 않고, 제도의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신음에도 응답하는 일이다. 사업계획서를 쓸 때도, 봉사자를 모집할 때도, 회의에서 의견을 나눌 때도, 우리가 늘 마음 한편에 품어야 할 태도다.
예수님은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고 말씀하셨다. 복잡한 철학이 아니다. 실무자도, 관리자도, 자원봉사자도, 모두에게 주어진 간단하면서도 어렵고, 그래서 더욱 고귀한 초대다.
오늘도 책상 위에 놓인 여러 문서들 사이에서 문득 사마리아인의 손길을 떠올려 본다. 누군가를 위해 멈추는 그 장면을. 내가 멈추고, 함께 아파할 수 있을 때, 어쩌면 그 순간이야말로 우리 조직이 가장 ‘거룩한’ 순간이 아닐까.